인문기행

누정기행 15 양양 하조대(河趙臺)

경산 耕山 2026. 6. 15. 04:56

하조대의 늙은 소나무


벼랑 끝
한 그루 소나무
돌 틈을 끝까지 파고든 뿌리
침묵은 오래 눌린 자의 힘
아무 말 없이 푸르다

조준과 하륜의 만남도
혁명의 꿈도
파도에 씻겨 사라졌지만
가지 끝에 맺힌 푸른 기운
차갑게 빛난다

모두가 계절 따라 색을 바꿀 때
독야청청
품격이 된 나무
오늘도
가장 위태로운 자리에서
가장 깊은 하늘을 밀어 올린다

둥근 암반 위에 또렷하게 새겨진  ‘ 河趙臺 ’  세 글자 .  숙종 때 양양부사를 지낸 조유도가 새긴 것이라 전한다 .
애국송, 애국가 배경 화면에 나왔던 소나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애국송 뒷모습

파도 위에 새긴 이름, 하조대

동해를 따라 남으로 달리는 길은 이상하게도 마음의 속도를 늦춘다.
의상대를 지나 하조대로 접어드는 길목에서는 바다보다 먼저 소나무 향이 다가온다.
휘어진 해송 사이로 햇빛이 부서지고, 길은 조금씩 바다를 향해 기울어진다.
오래전 선비들도 이 길 어디쯤에서 걸음을 늦추었을 것이다.
경치를 본다는 것은 결국 자기 마음의 결을 들여다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조대에 이르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정자가 아니다.
정자 앞 바위에 새겨진 세 글자.
河趙臺.
둥근 암반 위에 또렷하게 새겨진 이 글씨는 숙종 때 양양부사를 지낸 조유도가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단정하면서도 힘 있는 필획은 수백 년의 바람과 비를 견디며 지금까지 남아 있다.
바위는 조금씩 닳아 갔지만 이름은 지워지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자연은 원래 이름이 없다.
바다는 그저 바다이고, 바위는 그저 바위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앞에서 이름을 붙이고 이야기를 만든다.
하조대의 석각은 자연 위에 새겨진 역사의 흔적이다.
풍경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기억이 돌 속에 남은 것이다.

하조대라는 이름은 조선 개국공신 하륜과 조준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두 사람은 고려 말의 혼란을 지나 새로운 조선을 설계했던 정치가였다.
그러나 역사는 늘 단순하지 않다.
누군가에게 새로운 시대는 희망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실이 된다.
하조대라는 이름 속에는 우정의 기억만이 아니라 시대의 전환을 감당했던 사람들의 고민과 선택 또한 함께 스며 있다.

정자 주변의 해송 숲은 그런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아 온 증인 같다.
그 가운데에는 ‘애국송’이라 불리는 노송 한 그루가 서 있다.
거센 해풍을 견디며 한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바다를 향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 모습에서 충절을 읽는다.
그러나 나는 그 굽은 몸에서 세월을 견딘 존재의 고독을 본다.
곧게 서 있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끝내 쓰러지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정자에 올라서면 동해가 거침없이 열린다.
수평선은 단순히 먼 곳에 그어진 선이 아니다.
인간의 시선을 바깥으로 밀어내는 거대한 질문처럼 다가온다.
파도는 쉼 없이 바위를 두드린다.
바다는 단 한순간도 같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역사가 변하고 사람이 바뀌어도 바다가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는 이유일 것이다.

하조대는 조선 시대 내내 관동팔경 유람길의 중요한 명소였다.
수많은 문인과 관료들이 이곳을 찾아 시를 남기고 술잔을 기울였다.
그들은 파도를 바라보며 세상을 논하고, 거문고를 타며 바람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때로는 벼슬길의 영광을 이야기했을 것이고, 때로는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한탄했을 것이다.
동해 앞에 서면 권세도 명예도 오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선비들은 이곳을 사랑했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크기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문장가 농암 김창협도 하조대를 노래했다.

두 정승 떠난 지 몇백 년인가
높은 대는 푸른 바다 위에 의연한데
소나무 사이 불어오는 만고의 바람
나그네 마음 씻어 주어 돌아갈 줄 모르네

그의 시에는 화려한 감탄보다 절제된 사색이 담겨 있다.
풍경을 보는 일이 곧 마음을 씻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옛 선비들에게 시를 짓는다는 것은 경치를 소비하는 일이 아니었다.
자연 속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일이었다.

오늘날 하조대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정자와 바다는 순식간에 사진으로 저장되고, 풍경은 기억보다 먼저 화면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하조대의 진짜 가치는 풍경 그 자체에만 있지 않다.
이곳은 우리에게 묻는다.
무엇을 보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 속에서 잠시 걸음을 늦추고 바다를 오래 바라보는 일.
이름보다 존재를 생각하는 일.
그것이 오늘의 하조대가 건네는 가장 현대적인 질문인지도 모른다.

이번 답사에서 찾은 의상대와 하조대는 모두 동해의 절벽 위에 서 있다.
두 곳의 정신은 다르다.
의상대가 진리를 찾던 구도자의 숨결이 머무는 ‘명상과 정화의 공간’이라면,
하조대는 역사를 만들고 시대를 건너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아 있는 ‘호연지기의 공간’이다.
둘 다 일출 명소로 유명하지만, 이번에는 끝내 새벽을 만나지 못했다.
아쉬움은 남았지만 괜찮다.
좋은 풍경은 한 번에 다 보여 주지 않는다.
동해의 파도처럼, 다시 오라고 오래도록 마음을 두드리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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