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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밀어 올리는 매화

달을 밀어 올리는 매화 - 어몽룡의 〈월매도(月梅圖)〉묵은 등걸에풍상이 패이고여린 가지 곧추서달을 밀어 올린다다닥다닥 맺힌 꽃상처가 밝힌 별빛남의 붓끝 벗어난 먹빛조선의 매운 향이 번진다달빛 아래, 조선의 매화가 서다달은 둥글지만 밝지 않다. 엷은 먹빛에 싸여 구름 속에 잠긴 듯하고, 스스로 빛나기보다 매화 한 그루를 조용히 비추고 있다. 그 아래에서 매화 가지 하나가 화면을 가르며 하늘로 치솟았다. 옆으로 휘거나 아래로 처지지 않고, 달을 향해 곧고 힘차게 올랐다. 달은 고요하고 매화는 움직인다. 둥근 달의 정적과 곧은 가지의 기세가 만나면서, 텅 빈 화면에는 말 없는 긴장이 흐른다.그림 아래쪽의 늙은 등걸에는 세월이 깊이 패여 있다. 마른 붓이 지나가며 남긴 희끗한 자국은 껍질이 벗겨지고 속살이..

인문기행 2026.09.08

누정기행 46 그림 속의 정자 '총석정'

단원 김홍도의 총석정> 돌기둥은 하늘까지천 년을 밀어 올리고작은 정자 하나그 높이를 가늠한다바다 앞 한 점 사람풍경 속으로 작아지고사람이 작아진 자리총석은 더욱 높아진다한 점의 풍류객— 단원 김홍도의 《총석정(叢石亭)》풍경을 바라보는 눈동해의 바다는 참 이상하다. 부드러운 물이 가장 단단한 돌을 빚어 놓았다. 단원의 《총석정》을 펼치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다 위로 곧게 솟은 돌기둥들이다. 하나둘 선 바위가 아니다. 수많은 석주가 숲처럼 솟아 하늘을 떠받친다. 마치 대지가 품고 있던 거대한 대나무 숲이 어느 날 한순간 돌로 굳어버린 듯하다.파도는 그 아래를 쉼 없이 두드리고, 흰 물보라는 돌기둥 사이를 헤집으며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그 장대한 돌숲 곁에 작은 정자 하나가 앉아 있다. 너무 작아 처음..

인문기행 2026.09.06

비선농원 이야기

연민과 책임의 사이농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대추’라는 개가 산다. 검정 바탕에 눈가와 네 다리만 밤색 털이 도는, 귀엽고도 잘생긴 녀석이다. 우리 농장 옆 대추나무 아래에서 발견되어 대추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름 하나 없이 버려진 어린 강아지가 한 그루 나무의 이름을 물려받고, 한 사람의 가족이 된 것이다. 대추의 주인은 올해 구순을 맞은 독거노인이다. 내가 형님으로 모시는 분이지만 거동이 불편해 대추를 자주 산책시키거나 목욕시키고, 아플 때마다 병원에 데려갈 형편은 못 된다. 넉넉한 재산도 화려한 집도 없다. 형님이 대추에게 내어 준 것은 자신이 먹는 음식 한 점과 비바람을 피할 자리, 그리고 버려진 생명을 품어 준 마음 한 칸이 전부일지 모른다. 그러나 대추에게 그 한 칸은 세상의 전부였다.대추는 ..

비선농원 2026.09.04

먼저 건넌 웃음

먼저 건넌 웃음 - 김시의 〈동자견려도〉 얕은 개울가통나무다리 사이앙다문 입매에 움켜쥔 고집겁먹은 눈망울 벌름대는 콧구멍고삐 한 줄 마주하고줄다리기 팽팽하다산수는 잠시 길을 멈추고웃음부터 건너간다감상에세이 '고삐 사이'얕은 개울 앞에서 나귀가 걸음을 멈추었다. 물살이 깊거나 거센 것도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몇 걸음에 건널 수 있는 물이다. 그러나 나귀에게는 그 몇 걸음이 아득한 낭떠러지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네 발로 땅을 버티고 목을 뒤로 뺀 채 한 발도 내딛지 못한다. 동자는 나귀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아니, 알 겨를이 없다. 길을 가야 하니 고삐를 힘껏 잡아당길 뿐이다. 작은 몸은 앞으로 기울고, 나귀의 몸은 뒤로 물러선다. 가려는 마음과 가지 않으려는 마음이 맞서면서, 두 존재 사이의 고삐가..

인문기행 2026.09.02

누정 기행 45 그림 속의 정자 '해산정'

겸재의 《해산정(海山亭)》을 보며산은 안개를 두르고바다는 숨결을 감춘다겸재는 붓끝으로바람의 결을 붙들었다산은 바다에 스미고바다는 산을 비춘다해산정에 이르면사람도 풍경이 된다금강과 동해가 만나는 자리 - 겸재의 《해산정(海山亭)》붓끝에서 만난 산과 바다금강산이 마지막 숨을 내쉬면 동해가 그것을 받아 안았다. 산은 바다를 향해 천천히 몸을 낮추고, 바다는 쉼 없이 밀려와 산의 발끝을 적신다. 산과 바다가 서로의 경계를 풀어놓는 자리. 그곳에 작은 정자 하나가 앉아 있다.해산정(海山亭).이름부터 산과 바다를 함께 품었다.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산을 내려오는 사람도 이곳에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을 것이다. 마루에 올라 바람을 맞고, 술잔을 기울이고, 산과 바다가 맞닿은 절묘한 경계를 바라보았다. 해산정은..

인문기행 2026.08.31

누정기행 44 그림 속의 정자 '피금정'

피금정(披襟亭) 옷깃을 풀자강바람이 길을 열었다금강은 아직 먼데마음은 먼저 산을 넘었다길은 사라지고정자만 화폭에 남았다우리가 잃은 것은그리워하며 걷던 길 하나였다옷깃을 풀고 마음을 열던 길- 그림 속에만 남은 피금정(披襟亭)금강산보다 먼저 열린 마음한양에서 금강산으로 향하던 길은 단순한 여행길이 아니었다. 평생 한 번은 꼭 다다르고 싶었던 이상향을 향한 순례였다. 철원을 지나 김화(金化)에 이르면 길은 다시 금성을 거쳐 단발령으로 이어졌다. 그 길목에서 나그네들은 피금정(披襟亭)을 만났다. 금강산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산을 향해 먼저 달려가고 있었다.피금(披襟)옷깃을 풀어 헤친다는 뜻이다. 먼 길을 걸어온 사람이 정자에 올라 옷깃을 풀고 바람을 맞는다. 조선시대 양반과 사대부들은 ..

인문기행 2026.08.28

높이와 깊이 사이

높이와 깊이 사이 - 정자에서 삶을 묻다산은 정자를 높이 들어한 조각 하늘을 내어 주고강물은 마루 아래 몸을 낮춰먼 바다의 깊이를 들려준다처마는 하늘을 향해 가볍게 들리고기둥은 말없이 땅을 깊이 짚었다뜻은 하늘처럼 높이 세우고삶은 바다처럼 깊이 품을 일빈 마루 한 칸에 앉아 보니하늘과 바다가 서로 닿아 있다높이와 깊이 사이삶에는 하늘같이 높은 삶이 있고, 바다같이 깊은 삶이 있다.하늘같이 높은 삶은 더 먼 곳을 바라보는 삶이고, 바다같이 깊은 삶은 더 많은 것을 품어내는 삶이다. 하나는 자신을 끌어올리는 힘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을 낮추어 세상을 받아들이는 힘이다. 사람은 이 두 방향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삶을 다듬어 왔다.조선의 선비들은 산에 올랐다. 산정에 올라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더 넓게 바라..

시나브로 2026.08.27

누정기행 43 그림 속의 정자 '압구정'

겸재의 압구정(狎鷗亭)을 읽다강물은 낮은 곳으로천천히 길을 내어주는데높이 오른 마음은끝내 그림자를 벗지 못했다정자는 바람을 품고갈매기를 벗으로 불렀다천 년을 흘러도 남는 것은갈매기의 자유였다권력은 왜 갈매기를 부러워했을까- 그림 속의 정자, 압구정(狎鷗亭)오늘날 ‘압구정’이라는 세 글자는 화려한 자본과 욕망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높이 솟은 빌딩과 아파트, 쉼 없이 달리는 자동차와 사람들. 서울에서도 세속적 성공의 이미지를 가장 강하게 품은 이름 가운데 하나다. 오래전 이곳에는 한강을 굽어보는 정자 한 채가 있었다. 바람이 마루를 지나고 달빛이 강물에 내려앉고 갈매기가 물 위를 날던 자리. 지금의 압구정에서 그 옛 풍경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겸재 정선의 《압구정》은 사라진 시간을 다시 불러낸다. 그림..

인문기행 2026.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