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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휴정에서

만휴정에서외나무다리 건너갓끈 풀어 쉬는 마음淸白 두 글자는빈 마루에 물빛으로 고였다검게 그을린 숲 사이여울은 흰 속살을 펼치고화마도 삼키지 못한맑은 가난 한 칸늦게 얻은 쉼— 안동 만휴정(晩休亭)가느다란 물소리가 먼저 나를 맞았다. 바위를 타고 내려온 물은 잠시 고였다가 다시 아래로 몸을 풀었다. 그 사이로 외나무다리 하나가 개울을 가로질렀다. 건너편에는 오래된 정자가 고요히 서 있었다. 좁은 다리에 발을 올리자 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한 발씩 옮기는 동안 시선은 자연스레 발밑의 맑은 물에 머물렀다.다리는 소박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에는 좁았으나, 한 사람이 제 마음을 데리고 건너기에는 넉넉했다. 보백당(寶白堂)이 평생 보물로 삼았다는 ‘청백’을 떠올렸다. 지켜 온 마음 하나면 충분하다는 듯, 다..

인문기행 2026.10.05

한류의 깊이를 묻다

한류의 깊이를 묻다 - 세계가 사랑하는 문화, 우리는 얼마나 사랑하는가요즘 한국 문화가 세계를 여행하고 있다.낯선 나라의 젊은이들이 한국 노래를 따라 부르고, 우리의 영화와 드라마가 지구 반대편 사람들의 저녁 시간을 차지한다. 김치를 먹고 비빔밥을 맛보며 한글을 배우는 사람도 늘었다. 궁궐과 사찰을 찾아오는 외국인의 모습도 낯설지 않다. 한류라는 말이 이제는 세계의 언어가 되었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열기 속에서 문득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세계가 좋아하는 우리의 문화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한류는 어느 날 갑자기 솟아난 물결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문화는 오래전부터 국경을 넘어가고 있었다. 다만 그때는 한류라는 이름이 없었고 오늘날처럼 빠른 길도 없었을 뿐이다. 조선의 화..

시나브로 2026.09.22

가을이 왔나 보다

가을이 왔나 보다누구나 사람 속에 살아도노을지는 산길을홀로 걷는 게 인생이다그래도 마음 속 어디엔가끊이지 않고강물처럼 소리없이 흐르는숨어 있는 따뜻한 인연도언제나 그 자리에고요히 흐르고 있다해지는 어스름에가을빛 내리는 산길은무지개가 피는동화같은 꽃대궐이 된다가을 생각이 꽃 피는오늘밤은 늦도록 잠이 오지 않는다늦게 마신 커피 때문일까커피는 그리움이 잠긴 검은 유혹이다

시나브로 2026.09.18

산은 낮고 물은 깊다

산은 낮고 물은 깊다—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낮은 산 물을 품고물은 선비의 마음을 품었다바위의 기세 내려놓은 산천둥근 능선마다 고요가 앉았다한 칸 서당 작은데펼친 뜻은 강물보다 깊다겸재는 풍경을 베끼지 않고그곳에 머물던 기운을 그렸다그림은 어떻게 한 집안의 기억이 되었을까그림 한 점을 오래 바라보면 그림보다 먼저 이야기가 보일 때가 있다.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가 그렇다. 낙동강 물길이 산 아래를 돌아간다. 산은 높지 않다. 둥글고 부드러운 흙산들이 서로 기대어 있고, 물가에는 작은 집 한 채가 고요히 앉아 있다.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 자리하고 고요히 머무는 도산서당이다. 그 안에 한 사람이 앉아 있다. 퇴계 이황이다. 퇴계는 그곳에서 《주자서절요》를 정리하고 〈주자서절요서〉를 지었다...

인문기행 2026.09.16

누정기행 48 草亭(빈집)

빈집을 지나다가 무너진 지붕 아래바람이 집을 기억한다정자는 풍류를 품고초옥은 저녁 연기를 품었다이름은 바람에 지워져도문지방은 발자국을 잊지 않는다풍류를 떠받친 것은이름 없는 서까래였다서까래가 기억하는 시간- 강선대 가는 길에 만난 빈집길목의 폐허에서 들은 오래된 숨결충북 영동 양산천의 푸른 물길을 따라 선녀가 내려왔다는 강선대(降仙臺)로 향한다.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물가 절벽 위의 우뚝한 정자가 아니다. 외딴 마을 어귀, 굽이진 흙길 곁에 홀로 남겨진 작은 초옥(草屋) 한 채다.지붕의 짚풀은 오래전에 무너져 내렸고, 세월의 때가 묻은 서까래만 앙상한 갈비뼈처럼 허공을 떠받치고 있다. 칡넝쿨은 휘어진 기둥을 타고 올라 집의 뼈대를 고요히 침식해 가고, 처마가 있던 자리에는 푸른 하늘이 지붕이 되어 낮..

인문기행 2026.09.14

바람을 그린 화가

바람을 그린 화가- 탄은 이정의 〈풍죽도(風竹圖)〉 푸른 댓잎날카로운 끝자락그림자 너머로 번지는보이지 않는 숨결휘어져도 꺾이지 않는 마디여백의 노래붓끝에 실린 바람의 뼈서슬이 푸르다 바람을 그린 화가바람은 형체가 없다. 손끝을 스치고 어느새 먼 곳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대숲에 들면 바람은 비로소 모습을 얻는다. 댓잎이 기울고 가지가 휘어지는 순간, 보이지 않던 바람의 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정의 〈풍죽도〉는 대나무를 빌려 바람의 얼굴을 그린 작품이다. 화면의 대나무는 한순간도 고요하지 않다. 줄기는 바람을 따라 몸을 굽히고, 길고 뾰족한 잎들은 한 방향으로 힘차게 쏠린다. 어떤 잎은 칼끝처럼 허공을 가르고, 어떤 잎은 서로 부딪치며 가늘게 떤다. 바람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먹빛에 긴장과 속도가 생긴다. ..

인문기행 2026.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