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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기행 44 그림 속의 정자 '피금정'

피금정(披襟亭) 옷깃을 풀자강바람이 길을 열었다금강은 아직 먼데마음은 먼저 산을 넘었다길은 사라지고정자만 화폭에 남았다우리가 잃은 것은그리워하며 걷던 길 하나였다옷깃을 풀고 마음을 열던 길- 그림 속에만 남은 피금정(披襟亭)금강산보다 먼저 열린 마음한양에서 금강산으로 향하던 길은 단순한 여행길이 아니었다. 평생 한 번은 꼭 다다르고 싶었던 이상향을 향한 순례였다. 철원을 지나 김화(金化)에 이르면 길은 다시 금성을 거쳐 단발령으로 이어졌다. 그 길목에서 나그네들은 피금정(披襟亭)을 만났다. 금강산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산을 향해 먼저 달려가고 있었다.피금(披襟)옷깃을 풀어 헤친다는 뜻이다. 먼 길을 걸어온 사람이 정자에 올라 옷깃을 풀고 바람을 맞는다. 조선시대 양반과 사대부들은 ..

인문기행 04:35:14

누정기행 43 그림 속의 정자 '압구정'

겸재의 압구정(狎鷗亭)을 읽다강물은 낮은 곳으로천천히 길을 내어주는데높이 오른 마음은끝내 그림자를 벗지 못했다정자는 바람을 품고갈매기를 벗으로 불렀다천 년을 흘러도 남는 것은갈매기의 자유였다권력은 왜 갈매기를 부러워했을까- 그림 속의 정자, 압구정(狎鷗亭)오늘날 ‘압구정’이라는 세 글자는 화려한 자본과 욕망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높이 솟은 빌딩과 아파트, 쉼 없이 달리는 자동차와 사람들. 서울에서도 세속적 성공의 이미지를 가장 강하게 품은 이름 가운데 하나다. 오래전 이곳에는 한강을 굽어보는 정자 한 채가 있었다. 바람이 마루를 지나고 달빛이 강물에 내려앉고 갈매기가 물 위를 날던 자리. 지금의 압구정에서 그 옛 풍경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겸재 정선의 《압구정》은 사라진 시간을 다시 불러낸다. 그림..

인문기행 2026.08.25

누정기행 42 그림속의 정자 '쌍도정'

겸재의 《쌍도정》 앞에서꽃은 연못을 채우고정자는 바람을 앉힌다붓끝은 말을 거두고여백 하나 깊어진다꽃보다 짙은 그리움먹빛으로 번져 있고텅 빈 정자에는한 사람이 가득하다겸재의 텅 빈 화폭- 겸재 정선의 쌍도정(雙島亭)>성주 역사테마공원에 도착하자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느다란 빗줄기가 갓 돋아난 신록을 조용히 적셨다. 우산을 받쳐 들고 연못 쪽으로 걸었다. 비를 무릅쓰고 이곳까지 온 까닭은 하나였다. 이곳에 겸재의 그림을 바탕으로 복원한 쌍도정이 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쌍도정》의 풍경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림 속에 남아 있는 옛 정자의 흔적을 눈으로 확인하려는 것만은 아니었다. 삼백 년 전 한 화가가 이 정원을 바라보며 무엇을 그리고, 무엇을 끝내 그리지 않았는지 묻고 싶었다.쌍도정은 성주 관아..

인문기행 2026.08.23

누정기행 41 창덕궁 농수정(濃繡亭)

농수정에서숲은 말이 없는데마음은 먼저 고요해진다바람은 임금을 모르고그늘은 높낮이를 묻지 않는다비단은 꽃이 아니라계절이 수놓는 것이다가장 깊은 숲 한가운데비로소 한 사람이 앉는다왕도 혼자이고 싶을 때창덕궁 후원의 정자들은 저마다 왕의 하루와 삶을 완성하던 서로 다른 숨결을 품고 있다. 부용정에서는 책을 펼쳐 나라의 내일을 생각하고, 관람정에서는 시선을 물가까지 낮추어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연경당 선향재 뒤편 숲길을 따라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나지막한 정자 하나를 만난다.농수정(濃繡亭)이다.높이 치솟은 누각도 아니다. 넓은 연못을 앞에 두지도 않았다. 숲속 언덕에 조용히 몸을 숨기고 있다. 그곳에서는 정자보다 숲이 먼저 보이고, 사람보다 바람이 먼저 다가온다. 새소리가 들리고 나뭇잎이 흔들린다. 바람..

인문기행 2026.08.20

누정기행 40 창덕궁 관람정(觀纜亭)

관람정에서낮게 앉은 정자 하나연못이 먼저 하늘을 품는다흔들리는 것은 물결인데깊어지는 것은 바라보는 눈그림자와 실경이한 몸 되어 말을 건넨다높이 선 이가 아니라낮게 본 이가 세상을 읽는다왕의 눈이 머문 자리창덕궁 후원의 숲길은 사람의 걸음을 조금씩 늦춘다. 나무 사이를 따라 한참 걷다 보면 시선이 낮아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산을 향해 높이 선 누각도 아니고, 넓은 연못을 굽어보는 화려한 정자도 아니다. 숲과 물 사이. 작은 정자 하나가 연못 가장자리에 조용히 몸을 낮추고 있다.관람정(觀纜亭)이다.정자는 마치 물 위에 띄운 한 척의 배를 닮았다. 부채를 활짝 펼친 듯한 지붕은 물결처럼 유려하고, 기둥은 물 가까이 내려앉아 자신의 그림자를 연못 위에 드리운다. 바람이 멎으면 정자와 그림자는 하나가 되고, 잔물..

인문기행 2026.08.17

광복절에 대하여

광복절에 대하여달력에는 붉은 날 하나거리에는 태극기 몇 장우리는 오래도록기념하는 법만 배웠다나라를 되찾은 날보다나라의 주인으로 사는 일지나간 역사의 마침표보다오늘을 다시 묻는 물음표붉은 날짜 너머, 잊혀진 질문을 위하여이른 아침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방송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광복절이니 집집마다 태극기를 달아 달라는 말이었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태극기 게양한 집이 많지 않았다. 한 동에 하나쯤 보이다가, 어떤 동에는 몇 층을 올려다보아도 보이지 않았다.어릴 적 광복절 아침이 생각났다. 장롱 깊숙이 넣어 두었던 태극기를 꺼냈다. 흰 천의 주름을 펴고 대문 옆에 국기봉을 꽂았다. 학교에서는 국기 게양 방법도 가르쳤다. 그 일이 무슨 대단한 의식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골..

시나브로 2026.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