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023

산은 낮고 물은 깊다

산은 낮고 물은 깊다—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낮은 산 물을 품고물은 선비의 마음을 품었다바위의 기세 내려놓은 산천둥근 능선마다 고요가 앉았다한 칸 서당 작은데펼친 뜻은 강물보다 깊다겸재는 풍경을 베끼지 않고그곳에 머물던 기운을 그렸다그림은 어떻게 한 집안의 기억이 되었을까그림 한 점을 오래 바라보면 그림보다 먼저 이야기가 보일 때가 있다.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가 그렇다. 낙동강 물길이 산 아래를 돌아간다. 산은 높지 않다. 둥글고 부드러운 흙산들이 서로 기대어 있고, 물가에는 작은 집 한 채가 고요히 앉아 있다.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 자리하고 고요히 머무는 도산서당이다. 그 안에 한 사람이 앉아 있다. 퇴계 이황이다. 퇴계는 그곳에서 《주자서절요》를 정리하고 〈주자서절요서〉를 지었다...

인문기행 04:57:33

누정기행 48 草亭(빈집)

빈집을 지나다가 무너진 지붕 아래바람이 집을 기억한다정자는 풍류를 품고초옥은 저녁 연기를 품었다이름은 바람에 지워져도문지방은 발자국을 잊지 않는다풍류를 떠받친 것은이름 없는 서까래였다서까래가 기억하는 시간- 강선대 가는 길에 만난 빈집길목의 폐허에서 들은 오래된 숨결충북 영동 양산천의 푸른 물길을 따라 선녀가 내려왔다는 강선대(降仙臺)로 향한다.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물가 절벽 위의 우뚝한 정자가 아니다. 외딴 마을 어귀, 굽이진 흙길 곁에 홀로 남겨진 작은 초옥(草屋) 한 채다.지붕의 짚풀은 오래전에 무너져 내렸고, 세월의 때가 묻은 서까래만 앙상한 갈비뼈처럼 허공을 떠받치고 있다. 칡넝쿨은 휘어진 기둥을 타고 올라 집의 뼈대를 고요히 침식해 가고, 처마가 있던 자리에는 푸른 하늘이 지붕이 되어 낮..

인문기행 2026.09.14

바람을 그린 화가

바람을 그린 화가- 탄은 이정의 〈풍죽도(風竹圖)〉 푸른 댓잎날카로운 끝자락그림자 너머로 번지는보이지 않는 숨결휘어져도 꺾이지 않는 마디여백의 노래붓끝에 실린 바람의 뼈서슬이 푸르다 바람을 그린 화가바람은 형체가 없다. 손끝을 스치고 어느새 먼 곳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대숲에 들면 바람은 비로소 모습을 얻는다. 댓잎이 기울고 가지가 휘어지는 순간, 보이지 않던 바람의 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정의 〈풍죽도〉는 대나무를 빌려 바람의 얼굴을 그린 작품이다. 화면의 대나무는 한순간도 고요하지 않다. 줄기는 바람을 따라 몸을 굽히고, 길고 뾰족한 잎들은 한 방향으로 힘차게 쏠린다. 어떤 잎은 칼끝처럼 허공을 가르고, 어떤 잎은 서로 부딪치며 가늘게 떤다. 바람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먹빛에 긴장과 속도가 생긴다. ..

인문기행 2026.09.12

누정기행 47. 그림 속의 정자 '농수정'

그림에 옮겨 지은 정자— 조세걸의 〈농수정〉피바람 등진 골짜기물소리 한 자락 가두고아홉 굽이 맑은 물에도의 한 줄 건져 올린다시가 흐르면 그림이 되고진경은 조선의 눈을 뜨니화폭에 남은 빈 정자오늘의 마음을 돌아본다물소리를 가두고 도의를 건지다《곡운구곡도첩》 〈농수정도〉에 담긴 장동 김씨의 은일과 진경백골이 모래가 되도록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다며 울부짖던 청음(淸陰) 김상헌의 절의는 가문의 피 속에 짙게 흩뿌려져 있었다. 1674년 갑인예송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이어 1680년 경신환국과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이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당쟁의 폭풍 속에서 장동 김씨(장동에 뿌리내린 안동김씨) 가문은 정치적 번민의 중심에 서 있었다. 사대부의 의리가 짓밟히고 조정이 소인배들의 권모술수로 물드는 조정에..

인문기행 2026.09.10

달을 밀어 올리는 매화

달을 밀어 올리는 매화 - 어몽룡의 〈월매도(月梅圖)〉묵은 등걸에풍상이 패이고여린 가지 곧추서달을 밀어 올린다다닥다닥 맺힌 꽃상처가 밝힌 별빛남의 붓끝 벗어난 먹빛조선의 매운 향이 번진다달빛 아래, 조선의 매화가 서다달은 둥글지만 밝지 않다. 엷은 먹빛에 싸여 구름 속에 잠긴 듯하고, 스스로 빛나기보다 매화 한 그루를 조용히 비추고 있다. 그 아래에서 매화 가지 하나가 화면을 가르며 하늘로 치솟았다. 옆으로 휘거나 아래로 처지지 않고, 달을 향해 곧고 힘차게 올랐다. 달은 고요하고 매화는 움직인다. 둥근 달의 정적과 곧은 가지의 기세가 만나면서, 텅 빈 화면에는 말 없는 긴장이 흐른다.그림 아래쪽의 늙은 등걸에는 세월이 깊이 패여 있다. 마른 붓이 지나가며 남긴 희끗한 자국은 껍질이 벗겨지고 속살이..

인문기행 2026.09.08

누정기행 46 그림 속의 정자 '총석정'

단원 김홍도의 총석정> 돌기둥은 하늘까지천 년을 밀어 올리고작은 정자 하나그 높이를 가늠한다바다 앞 한 점 사람풍경 속으로 작아지고사람이 작아진 자리총석은 더욱 높아진다한 점의 풍류객— 단원 김홍도의 《총석정(叢石亭)》풍경을 바라보는 눈동해의 바다는 참 이상하다. 부드러운 물이 가장 단단한 돌을 빚어 놓았다. 단원의 《총석정》을 펼치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다 위로 곧게 솟은 돌기둥들이다. 하나둘 선 바위가 아니다. 수많은 석주가 숲처럼 솟아 하늘을 떠받친다. 마치 대지가 품고 있던 거대한 대나무 숲이 어느 날 한순간 돌로 굳어버린 듯하다.파도는 그 아래를 쉼 없이 두드리고, 흰 물보라는 돌기둥 사이를 헤집으며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그 장대한 돌숲 곁에 작은 정자 하나가 앉아 있다. 너무 작아 처음..

인문기행 2026.09.06

비선농원 이야기

연민과 책임의 사이농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대추’라는 개가 산다. 검정 바탕에 눈가와 네 다리만 밤색 털이 도는, 귀엽고도 잘생긴 녀석이다. 우리 농장 옆 대추나무 아래에서 발견되어 대추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름 하나 없이 버려진 어린 강아지가 한 그루 나무의 이름을 물려받고, 한 사람의 가족이 된 것이다. 대추의 주인은 올해 구순을 맞은 독거노인이다. 내가 형님으로 모시는 분이지만 거동이 불편해 대추를 자주 산책시키거나 목욕시키고, 아플 때마다 병원에 데려갈 형편은 못 된다. 넉넉한 재산도 화려한 집도 없다. 형님이 대추에게 내어 준 것은 자신이 먹는 음식 한 점과 비바람을 피할 자리, 그리고 버려진 생명을 품어 준 마음 한 칸이 전부일지 모른다. 그러나 대추에게 그 한 칸은 세상의 전부였다.대추는 ..

비선농원 2026.09.04

먼저 건넌 웃음

먼저 건넌 웃음 - 김시의 〈동자견려도〉 얕은 개울가통나무다리 사이앙다문 입매에 움켜쥔 고집겁먹은 눈망울 벌름대는 콧구멍고삐 한 줄 마주하고줄다리기 팽팽하다산수는 잠시 길을 멈추고웃음부터 건너간다감상에세이 '고삐 사이'얕은 개울 앞에서 나귀가 걸음을 멈추었다. 물살이 깊거나 거센 것도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몇 걸음에 건널 수 있는 물이다. 그러나 나귀에게는 그 몇 걸음이 아득한 낭떠러지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네 발로 땅을 버티고 목을 뒤로 뺀 채 한 발도 내딛지 못한다. 동자는 나귀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아니, 알 겨를이 없다. 길을 가야 하니 고삐를 힘껏 잡아당길 뿐이다. 작은 몸은 앞으로 기울고, 나귀의 몸은 뒤로 물러선다. 가려는 마음과 가지 않으려는 마음이 맞서면서, 두 존재 사이의 고삐가..

인문기행 2026.09.02

누정 기행 45 그림 속의 정자 '해산정'

겸재의 《해산정(海山亭)》을 보며산은 안개를 두르고바다는 숨결을 감춘다겸재는 붓끝으로바람의 결을 붙들었다산은 바다에 스미고바다는 산을 비춘다해산정에 이르면사람도 풍경이 된다금강과 동해가 만나는 자리 - 겸재의 《해산정(海山亭)》붓끝에서 만난 산과 바다금강산이 마지막 숨을 내쉬면 동해가 그것을 받아 안았다. 산은 바다를 향해 천천히 몸을 낮추고, 바다는 쉼 없이 밀려와 산의 발끝을 적신다. 산과 바다가 서로의 경계를 풀어놓는 자리. 그곳에 작은 정자 하나가 앉아 있다.해산정(海山亭).이름부터 산과 바다를 함께 품었다.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산을 내려오는 사람도 이곳에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을 것이다. 마루에 올라 바람을 맞고, 술잔을 기울이고, 산과 바다가 맞닿은 절묘한 경계를 바라보았다. 해산정은..

인문기행 2026.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