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014

누정 기행 45 그림 속의 정자 '해산정'

겸재의 《해산정(海山亭)》을 보며산은 안개를 두르고바다는 숨결을 감춘다겸재는 붓끝으로바람의 결을 붙들었다산은 바다에 스미고바다는 산을 비춘다해산정에 이르면사람도 풍경이 된다금강과 동해가 만나는 자리 - 겸재의 《해산정(海山亭)》붓끝에서 만난 산과 바다금강산이 마지막 숨을 내쉬면 동해가 그것을 받아 안았다. 산은 바다를 향해 천천히 몸을 낮추고, 바다는 쉼 없이 밀려와 산의 발끝을 적신다. 산과 바다가 서로의 경계를 풀어놓는 자리. 그곳에 작은 정자 하나가 앉아 있다.해산정(海山亭).이름부터 산과 바다를 함께 품었다.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산을 내려오는 사람도 이곳에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을 것이다. 마루에 올라 바람을 맞고, 술잔을 기울이고, 산과 바다가 맞닿은 절묘한 경계를 바라보았다. 해산정은..

인문기행 04:19:10

누정기행 44 그림 속의 정자 '피금정'

피금정(披襟亭) 옷깃을 풀자강바람이 길을 열었다금강은 아직 먼데마음은 먼저 산을 넘었다길은 사라지고정자만 화폭에 남았다우리가 잃은 것은그리워하며 걷던 길 하나였다옷깃을 풀고 마음을 열던 길- 그림 속에만 남은 피금정(披襟亭)금강산보다 먼저 열린 마음한양에서 금강산으로 향하던 길은 단순한 여행길이 아니었다. 평생 한 번은 꼭 다다르고 싶었던 이상향을 향한 순례였다. 철원을 지나 김화(金化)에 이르면 길은 다시 금성을 거쳐 단발령으로 이어졌다. 그 길목에서 나그네들은 피금정(披襟亭)을 만났다. 금강산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산을 향해 먼저 달려가고 있었다.피금(披襟)옷깃을 풀어 헤친다는 뜻이다. 먼 길을 걸어온 사람이 정자에 올라 옷깃을 풀고 바람을 맞는다. 조선시대 양반과 사대부들은 ..

인문기행 2026.08.28

누정기행 43 그림 속의 정자 '압구정'

겸재의 압구정(狎鷗亭)을 읽다강물은 낮은 곳으로천천히 길을 내어주는데높이 오른 마음은끝내 그림자를 벗지 못했다정자는 바람을 품고갈매기를 벗으로 불렀다천 년을 흘러도 남는 것은갈매기의 자유였다권력은 왜 갈매기를 부러워했을까- 그림 속의 정자, 압구정(狎鷗亭)오늘날 ‘압구정’이라는 세 글자는 화려한 자본과 욕망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높이 솟은 빌딩과 아파트, 쉼 없이 달리는 자동차와 사람들. 서울에서도 세속적 성공의 이미지를 가장 강하게 품은 이름 가운데 하나다. 오래전 이곳에는 한강을 굽어보는 정자 한 채가 있었다. 바람이 마루를 지나고 달빛이 강물에 내려앉고 갈매기가 물 위를 날던 자리. 지금의 압구정에서 그 옛 풍경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겸재 정선의 《압구정》은 사라진 시간을 다시 불러낸다. 그림..

인문기행 2026.08.25

누정기행 42 그림속의 정자 '쌍도정'

겸재의 《쌍도정》 앞에서꽃은 연못을 채우고정자는 바람을 앉힌다붓끝은 말을 거두고여백 하나 깊어진다꽃보다 짙은 그리움먹빛으로 번져 있고텅 빈 정자에는한 사람이 가득하다겸재의 텅 빈 화폭- 겸재 정선의 쌍도정(雙島亭)>성주 역사테마공원에 도착하자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느다란 빗줄기가 갓 돋아난 신록을 조용히 적셨다. 우산을 받쳐 들고 연못 쪽으로 걸었다. 비를 무릅쓰고 이곳까지 온 까닭은 하나였다. 이곳에 겸재의 그림을 바탕으로 복원한 쌍도정이 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쌍도정》의 풍경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림 속에 남아 있는 옛 정자의 흔적을 눈으로 확인하려는 것만은 아니었다. 삼백 년 전 한 화가가 이 정원을 바라보며 무엇을 그리고, 무엇을 끝내 그리지 않았는지 묻고 싶었다.쌍도정은 성주 관아..

인문기행 2026.08.23

누정기행 41 창덕궁 농수정(濃繡亭)

농수정에서숲은 말이 없는데마음은 먼저 고요해진다바람은 임금을 모르고그늘은 높낮이를 묻지 않는다비단은 꽃이 아니라계절이 수놓는 것이다가장 깊은 숲 한가운데비로소 한 사람이 앉는다왕도 혼자이고 싶을 때창덕궁 후원의 정자들은 저마다 왕의 하루와 삶을 완성하던 서로 다른 숨결을 품고 있다. 부용정에서는 책을 펼쳐 나라의 내일을 생각하고, 관람정에서는 시선을 물가까지 낮추어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연경당 선향재 뒤편 숲길을 따라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나지막한 정자 하나를 만난다.농수정(濃繡亭)이다.높이 치솟은 누각도 아니다. 넓은 연못을 앞에 두지도 않았다. 숲속 언덕에 조용히 몸을 숨기고 있다. 그곳에서는 정자보다 숲이 먼저 보이고, 사람보다 바람이 먼저 다가온다. 새소리가 들리고 나뭇잎이 흔들린다. 바람..

인문기행 2026.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