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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뱀사골에서

가을 뱀사골에서그림 속을 거닐고물소리에 젖었다 비가 지나간 월요일 아침, 지리산으로 들었다. 산길은 아직 젖어 있었다. 굽이마다 단풍이 다른 빛깔로 맞아주었고, 길 위의 낙엽들은 물기를 머금어 한층 짙었다. 한적한 길을 따라 마음도 느릿느릿 산으로 들어갔다. 정령치에 이르자 천지가 한 솥의 곰탕이었다. 하늘과 산도, 가까운 능선과 먼 봉우리도 희뿌연 안개에 풀어져 있었다. 산을 보러 왔는데 산이 보이지 않았다. 차창 너머를 바라보며 잠시 머물렀다. 무엇이든 또렷하게 보려 애쓰던 눈이 모처럼 쉴 자리를 얻었다. 뱀사골 쪽으로 내려서자 안개가 걷히며 단풍길이 열렸다. 노란 잎 사이로 붉은 잎이 타오르고, 아직 푸른 가지들이 그 불빛을 받치고 있었다. 비에 씻긴 가을은 맑고도 진했다. 혼자 보기에는 아까웠다...

산수기행 05:16:50

월류봉에서

월류봉에서달빛마저 발을 멈춘 봉우리벼랑 끝 우산을 쓴 정자 하나바쁠 것 없는 강물 위에가을비가 작은 글씨를 쓴다빗방울마다 둥글게 번지는마침표 뒤의 말들삶이란 저마다의 계절에스스로 풍경이 되어가는 일가을비 내리는 월류봉에서 - 마침표 뒤의 이야기를 읽다달마저 쉬어간다는 영동 황간의 월류봉에 가을비가 내린다.바쁜 세상의 걸음을 잠시 놓아두고 초강천 굽이치는 강가에 서면, 깎아지른 벼랑 끝에 다정하게 우산을 쓰고 들어앉은 정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무심코 흐르는 강물은 서두르는 법이 없고, 그 서늘하고 고요한 수면 위로 가을비는 차분히 동그란 글씨를 새겨 나간다.수면에 떨어져 동그랗게 퍼져나가는 빗방울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서둘렀던 소음들에 마침표를 찍는 소리이자, 그 마침표 뒤로 나직하게..

시나브로 2026.10.25

남겨둔 자리

남겨둔 자리가을빛이 차오르는 산기슭, 흙냄새와 바람 소리가 번지는 농원에서 하루를 보내다 보면 문득 ‘삶을 채우는 일’보다 ‘남겨두는 일’의 귀함을 배우게 된다.얼마 전 참석했던 인문학 모임의 화두도 ‘남겨둠’이었다. 고전을 읽고 선현들의 발자취를 찾아다니며 오늘의 일상을 돌아보는 모임이다. 그날은 현역 시절에 삶을 다 누리며 소진하지 말고, 퇴직 후의 삶을 위해서도 얼마쯤 남겨두자는 이야기를 나누었다.음식에 빗대니 뜻이 한결 가까워졌다. 전채 요리로 배를 채우면 정작 주된 요리가 나왔을 때는 젓가락이 무거워진다. 후식의 향긋함까지 누리려면 다음 접시가 놓일 자리를 생각하며 먹어야 한다. 한 끼의 즐거움에도 여백이 필요한 셈이다.삶에도 아직 나오지 않은 음식이 있다.젊은 날에는 눈앞의 한 접시가 전부인 ..

시나브로 2026.10.23

과식

과식가을비가 축축하게 저녁을 적셨다. 가로등 불빛이 젖은 길 위로 길게 번졌다. 이런 저녁이면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내게는 홍탁삼합이다. 오늘 채주한 비선주 한 병을 들고 단골 홍탁집을 찾았다. 막 걸러낸 술병에는 아직 술을 빚던 시간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문을 열자 익숙한 냄새가 먼저 맞았다. 삭힌 홍어의 알싸한 기운에 묵은 김치의 시큼한 향이 섞여 있었다. 처음에는 코끝을 밀어내던 냄새가 어느새 사람을 안으로 끌어당기는 냄새가 되었으니, 입맛에도 세월이 쌓이는 모양이다.술벗들과 마주한 식탁 위에 세 가지 음식이 푸짐했다. 부드러운 돼지고기, 적당히 삭힌 홍어, 오래 익은 김치. 김치 한 장에 고기와 홍어를 얹어 입으로 가져갔다. 돼지고기의 온순한 맛을 따라가다 보면 홍어의 톡 쏘는 기운이 코끝을 ..

시나브로 2026.10.21

봄에 길을 잃다

봄에 길을 잃다— 단원(壇園)의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를 마주하고가랑비 가는 실이말발굽에 감기는 봄젖은 가지 사이암수가 데우는 두 울음나그네 빈 가슴에노란 소리 한 쌍새소리에 고삐를 맡긴 봄발 아래 길도 잠시 먼 곳길을 잃어, 비로소 풍경이 되다대구간송미술관의 전시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마음으로 들른 기념품가게의 한쪽 모퉁이에서 운명처럼 한 폭의 그림을 다시 만났다. 단원 김홍도의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였다.진경시대, 평범한 조선의 봄날을 담아낸 이 아담한 화폭은 그림 안에 시가 있고, 시 안에 그림이 살아 숨 쉬는 ‘화중유시(畫中有詩), 시중유화(詩中有畫)’의 으뜸가는 경지로 내 마음속에 오랜 세월 깊이 자리해 온 작품이다. 오랜 시간 가슴 한구석에 간직해 온 그 고요한..

인문기행 2026.10.15

만휴정에서

만휴정에서외나무다리 건너갓끈 풀어 쉬는 마음淸白 두 글자는빈 마루에 물빛으로 고였다검게 그을린 숲 사이여울은 흰 속살을 펼치고화마도 삼키지 못한맑은 가난 한 칸늦게 얻은 쉼— 안동 만휴정(晩休亭)가느다란 물소리가 먼저 나를 맞았다. 바위를 타고 내려온 물은 잠시 고였다가 다시 아래로 몸을 풀었다. 그 사이로 외나무다리 하나가 개울을 가로질렀다. 건너편에는 오래된 정자가 고요히 서 있었다. 좁은 다리에 발을 올리자 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한 발씩 옮기는 동안 시선은 자연스레 발밑의 맑은 물에 머물렀다.다리는 소박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에는 좁았으나, 한 사람이 제 마음을 데리고 건너기에는 넉넉했다. 보백당(寶白堂)이 평생 보물로 삼았다는 ‘청백’을 떠올렸다. 지켜 온 마음 하나면 충분하다는 듯, 다..

인문기행 2026.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