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포대, 풍류를 묻다
오월의 바람이 솔숲을 지나
경포호수 위에
푸른 비단을 펼친다
호수엔 구름 한 점 머물고
갈매기 그림자 스치면
물결은 저마다 작은 시가 된다
‘경포대(鏡浦臺)’
물 위에 떠 있는 한 폭의 산수화
굵게 눌러 쓴 붓끝마다
관동의 바람이 일고
풍류의 여백이 출렁인다
옛 선비들은 달을 기다렸고
달은 호수에 먼저 내려왔다
하늘에 하나
호수에 하나
술잔에도 하나
마지막 달은
물 위가 아니라
눈동자 속에 떠 있었다




난초 지초 가지런히 동서로 둘러샀고
십리 호수 물안개는 수중에도 비치네
아침안개 저녁노을 천만가지 형상인데
바람결에 잔을 드니 흥겨웁기 그지 없네/ 숙종 어제시

물에 비친 마음
- 강릉 경포대(鏡浦臺)에서
강릉에는 오래된 질문 하나가 있다.
왜 수많은 선비들은 동해를 두고도 굳이 경포대에 올라 달을 바라보았을까.
바다라면 어디에나 파도는 있다. 달 또한 어느 곳에서나 떠오른다. 그런데도 수백 년 동안 이름난 시인과 묵객들은 이 누각으로 찾아와 술잔을 기울이고 시를 남겼다.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오월의 경포호를 찾았다.
솔숲 사이를 걸어 호숫가에 이르자 동해의 바람이 먼저 얼굴을 스쳤다. 이곳의 첫인상은 바다가 아니라 호수였다. 파도는 저 멀리 쉼 없이 밀려오는데, 경포호는 한 점 흔들림 없는 거울처럼 하늘을 품고 있었다. 움직임과 고요가 한 풍경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경포대, 거울 경(鏡).
경포대가 바라보는 것은 바다를 비추는 호수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이 풍경을 보며 자연만 감상한 것이 아니었다. 거울 같은 물 위에 자기 마음을 함께 비추었다. 그 마음을 가장 깊이 들여다본 사람이 율곡 이이였다.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 호수와 바다를 바라보며 자랐다. 『경포대부』에서 그는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는 일은 인(仁)과 지(智)를 배우는 길이라고 했다. 산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진 마음으로 이어지고, 물을 가까이하는 일은 지혜를 닦는 공부가 된다고 보았다. 율곡에게 경포대는 마음을 수양하는 학교였다.
한편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에게 경포의 달빛은 또 다른 의미였다.
허난설헌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자유를 시 속에서 꿈꾸었다. 그녀의 시에는 경포호가 수정궁의 거울처럼 맑고 신비로운 세계로 그려진다. 현실에서는 이루지 못했던 아름다움이 달빛 아래에서는 잠시 가능해졌다. 허균 또한 이 풍경을 누구보다 사랑했다. 세상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그의 상상력은 어쩌면 어린 시절 바라보았던 경포호의 넓은 수면에서 자라났는지도 모른다. 같은 달을 바라보았지만, 율곡은 학문을 보았고 허난설헌은 이상향을 보았으며 허균은 자유를 보았다.
정철 역시 이 풍경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관동별곡》에서 그는 경포대의 달과 술과 풍류를 노래하며, 기생 홍장과 박신의 일화를 떠올린다. 아름다운 풍경은 사람의 감정을 넓혀 주고, 사람의 이야기는 다시 풍경을 오래 살아남게 만든다.
경포대에는 '다섯 달'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늘의 달, 바다의 달, 호수의 달, 술잔 속의 달, 그리고 임의 눈동자에 비친 달.
달은 하나인데 사람마다 바라본 달은 달랐다. 고려 말 문장가 안축은 노를 늦추게 하고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물결이 거울처럼 잔잔해야 비로소 하늘의 달과 호수의 달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옛사람들이 기다린 것은 달이 아니라 마음이 고요해지는 순간이었다.
늙은 뱃사공에게 느리게 노를 저으라 하고
깊은 밤 외로운 달 떠오르기를 기다리네
물결이 잔잔하여 호수가 거울 같으니
하늘의 달과 호수의 달이 서로 비추누나
경포대 마루에 오래 앉아 있었다.
관광객들은 사진을 찍고, 휴대전화 화면 속에 풍경을 저장한 뒤 다시 길을 떠난다. 문득 생각했다. 우리는 옛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풍경을 본다. 그러나 한 풍경 앞에 오래 머무는 시간은 오히려 줄어든 것은 아닐까. 풍류는 화려한 놀이가 아니다. 오래 바라보는 능력이다. 자연을 통해 자기 마음을 비추는 일이다. 경포호는 오늘도 하늘을 담고 구름을 담고 달을 담는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 율곡과 허균, 허난설헌과 정철이 비추어 보았던 마음까지도 함께 담아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
나는 그 거울 앞에 잠시 서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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