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1등만 기억하는가
요즘 텔레비전을 켜면 트로트가 먼저 반긴다.
채널을 돌릴 때마다 노래 경연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화려한 조명 아래 수십 명의 참가자가 단 한 곡을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쏟아낸다. 첫 소절이 시작되면 객석은 숨을 죽이고, 이내 박수와 환호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심사위원은 눈시울을 붉히고, 시청자는 문자 한 통에 마음을 보탠다. 무대 위에서는 한 사람의 노래가 울리지만, 그 안에는 한 사람의 생애가 함께 흐른다. 무대 밖의 열기는 더욱 뜨겁다. 팬들은 밤새 응원 영상을 만들고, 이름을 새긴 현수막을 들고 공연장을 찾는다. 실시간 투표는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우승자가 발표되는 순간에는 월드컵 결승전 같은 함성이 터져 나온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트로트는 부모 세대의 음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젊은 가수들이 새로운 감각으로 노래하고, 어린아이부터 노년층까지 함께 흥얼거린다. K-팝이 세계에 한국의 젊음을 알렸다면, 트로트는 한국인의 삶과 정서를 품은 또 하나의 K-문화로 자라나고 있다.
왜 사람들은 다시 트로트에 열광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 노래 속에는 우리가 잊고 살았던 삶의 온기가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를 향한 그리움, 고향의 냄새, 실패를 견디는 힘, 눈물 끝에 피어나는 웃음…. 트로트는 노래를 잘하는 사람보다 삶을 오래 견딘 사람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래를 듣기보다 사람을 듣는다. 그런데 무대가 끝날 무렵이면 늘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수십 명이 함께 감동을 만들었지만 왕관은 한 사람의 머리에만 얹힌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우리는 왜 1등만 기억하는가.'
이 잔인하도록 명확한 승자독식의 축소판은 비단 노래 경연장에만 머물지 않는다.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군 월드컵 결승전의 풍경 역시 다르지 않았다. 경기종료 휩슬소리와 함께 승패가 갈린 그라운드 위는 빛과 그림자가 가장 극명하게 교차하는 무대였다. 황금빛 우승컵을 들어 올린 승자들의 찬란한 환호성 뒤편으로, 패배한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얼굴에는 깊은 상실감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졌다. 고작 한 끝 차이의 패배, 그 지독한 좌절감을 견디지 못한 선수들 사이에 이어진 거친 언쟁과 주먹다툼은 온 세계가 지켜보는 화면을 씁쓸하게 물들였다. 단 하나의 승자만을 허락하는 냉혹한 경기장에서, 2등이라는 번호표는 치욕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선거에서도 그렇다. 한 표라도 더 얻은 사람이 모든 책임과 권한을 가진다. 시장에서는 먼저 앞선 기업이 더 많은 기회를 차지한다. 운동장에서는 금메달의 이름은 오래 남지만 은메달의 눈물은 금세 잊힌다. 학교에서는 한 문제 차이로 순위가 갈리고, 학생들은 어릴 적부터 경쟁이라는 출발선 앞에 선다. 트로트를 꿈꾸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새벽부터 발성 연습을 하고, 주말이면 전국의 예선을 찾아다닌다. 부모들은 레슨비를 마련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생업을 뒤로한 채 아이의 꿈을 따라다닌다. 스포츠도, 예술도, 공부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아이의 꿈 뒤에는 한 가족의 시간이 포개져 있다.
마지막에 환하게 웃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우리는 아이들에게 꿈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승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경쟁을 삶의 방식이 아니라 삶의 목적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결과는 과정보다 중요해졌고, 순위는 사람의 가치를 대신했다. 함께 달리는 기쁨보다 먼저 도착하는 기쁨을, 오래 버틴 사람보다 가장 높이 오른 사람을 기억하는 사회가 되었다. 열심히 하는 사람보다는 잘 하는 사람이 평가를 받았다.
'1등만 기억하는 세상.'
한때 광고 문구였던 이 말은 어느새 시대의 상식처럼 들린다.
그러나 자연은 다른 길을 보여 준다. 숲은 가장 큰 나무 하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작은 풀과 이름 없는 꽃, 벌과 새, 보이지 않는 미생물까지 제 몫을 다할 때 비로소 하나의 숲이 된다. 강도 앞선 물이 뒤의 물을 밀어내지 않는다. 먼저 흐른 물이 길을 만들고, 뒤따르는 물이 그 길을 이어 바다에 이른다. 자연은 경쟁보다 공존을 통해 오래 살아남는 법을 알고 있다.
사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명을 발전시킨 것은 경쟁일지 모른다. 그러나 공동체를 지켜 온 것은 경쟁이 아니라 공감이었다. 넘어졌을 때 내미는 손, 성공보다 성장을 축하하는 마음, 먼저 간 사람이 뒤따르는 사람을 기다려 주는 여유가 우리 사회를 버티게 해 왔다. 조선 시대의 정자는 그런 삶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모인 곳이 아니라 함께 시를 짓고, 함께 풍경을 바라보고, 함께 마음을 나누던 자리였다. 경쟁보다 관계를 소중히 여긴 문화가 그 작은 마루 위에 스며 있었다.
우리는 왜 1등만 기억하는가.
이제는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보다 끝까지 함께 걸어 준 사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보다 가장 많은 사람을 일으켜 세운 사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우승자는 한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우승을 만들어 낸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까지 기억할 때, 비로소 우리의 사회는 경쟁을 넘어 공동체가 된다. 사람은 혼자 이겨서 행복해지는 존재가 아니다. 함께 살아갈 때 비로소 사람다운 삶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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