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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수 없는 열매

먹을 수 없는 열매 — 이중섭의 천도복숭아>를 보며병실의 창가에 걸린손바닥만한 그림 한 장 천년의 세월을 견딘다는천도 복숭아​“빈손으로 올 수 없어 늦었네”“이걸 먹고 어서 일어나게” 가난한 화가의 붓 끝에서 피어난영원히 마르지 않을 생명먹을 수 없는 열매복숭아 향보다 진한 온기텅 빈 가슴 붉게 채웠네두 아이가 마치 대칭을 이루듯 복숭아를 사이에 두고 놀고 있다. 이중섭의 천진난만한 개성이 오롯이 묻어난다. 천도복숭아는 무병장수의 상징이다. 이중섭과 절친이었던 구상 시인이 폐결핵으로 수술을 했을 때 그는 이중섭을 그리워하며 기다렸다. 뒤늦게 병문안을 온 이중섭은 빈손으로 올 수 없어 그림을 준비해 왔는데, 바로 천도복숭아 그림이었다. 그러면서 “자네도 이걸 먹고 어서 일어나게.” 하였다. 구상은 가난..

인문기행 2026.03.19

산수유

산수유메마른 가지 끝에 노란 등불 켜 두었나꽃샘추위 설운 바람 빈 몸으로 맞서더니긴 기다림 맺힌 눈물은 금가루가 되었구나하나씩 떼어놓으면 가녀린 노란 점들서로의 어깨를 괸 채 뭉치어 피어나니겨우내 닫힌 세상을 그 온기로 녹이는가작음의 미학, 그 깊은 울림1. 산수유는 홀로 돋보이려 애쓰지 않습니다. 수십 개의 작은 꽃들이 한자리에 모여 비로소 하나의 풍경을 완성합니다. 이는 '나'보다 '우리'를 먼저 생각하는 공동체의 지혜를 보여줍니다.2. 화려한 목련이나 벚꽃처럼 순식간에 피었다 지지 않고, 아주 작은 꽃잎들을 하나하나 성실히 밀어 올립니다. 그 꾸준함이 모여 산천을 노랗게 물들이는 광경은 평범한 이들의 일상이 쌓여 만드는 역사의 위대함과 닮아 있습니다.3.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작은 몸짓으로 봄을..

시나브로 2026.03.17

해오라기

해오라기 천 길 물 속 사정 눈동자에 가둬두고눈 한번 깜빡임에 온 세월을 묻어둔 채단 한 번 찰나의 마주침 화살처럼 쏘노라굽어본 물결 위에 적막만 다시 고여외다리 깊은 고독 세월인 양 견디더니먼 하늘 봄빛 실은 날개 비상을 채비한다 비워야 날겠기에 어제는 잊었느냐머묾과 떠남 사이 한 줄기 바람 되어하늘가 흔들리는 구름 바라보며 말이 없다

시나브로 2026.03.15

가장 먼 여행

가장 먼 여행, 거실기행 - 차마고도에서 멈춘 길, 식탁 위에서 이어지다세상의 모든 집 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손길이 머물고 있다. 아침 식탁 위로 퍼져 나오는 된장찌개의 따스한 향기, 햇살 속에 보송하게 말라 피부에 닿는 수건의 포근함, 먼지 하나 없이 반짝이는 마루의 고요함. 이 평온한 풍경은 결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누군가의 시간을 덜어내고, 무릎을 굽혀 정성을 쏟을 때 비로소 집 안에는 생활의 온기가 깃든다. 그 손길은 이름 없이 흘러가지만, 가족의 하루를 지탱하는 가장 깊은 힘이 된다.아내는 오랫동안 그 일을 해왔다. 가정을 지키는 파수꾼이자, 직장에서 묵묵히 걸어온 성실한 보행자였다. 결혼 초, 시외로 출퇴근하며 지쳐 돌아오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나는 ‘설거지는 스포츠’라 이름 붙이고..

시나브로 2026.03.13

사라진 나무의 그늘

사라진 나무의 그늘육십 년이라는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갔다.명절을 맞아 고향 학교를 찾았다. 내가 꿈을 키우던 ‘국민학교’는 이미 옛 모습을 감추고 없었다. 낮은 언덕 위에 검은 나무판자로 둘러친 교사(校舍)가 길게 늘어서 있던 그 학교 대신, 밝은 색 벽돌로 단장한 아담한 건물이 햇살 속에 조용히 서 있었다.옛 교실은 겨울바람에 창문이 덜컹거렸고, 여름이면 매미가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외벽 틈에는 박쥐들이 살고 있었고 운동장에는 늘 흙먼지가 일었다. 그 시절 학교는 늘 시끄러웠다. 아이들은 많았고 운동장은 언제나 좁았다. 종이 울리면 교실 문이 한꺼번에 열리며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발자국 소리와 웃음소리, 싸우다 울던 소리까지 뒤섞여 학교는 하루 종일 살아 있는 생물처럼 숨 쉬었다.그 북적임의 중심에..

시나브로 2026.03.11

기다림의 심리학

기다림의 심리학나는 빵을 좋아한다.갓 구워낸 빵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냄새는 바쁜 일상 속에서 만나는 작은 위로다. 그런데 이 소박한 빵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차를 타고 달려와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성소’가 된다는 사실을, 나는 이국의 식탁에서야 새삼 깨달았다. 이태리 여행에서 만난 일행이 내가 대전에 산다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 성심당 이야기를 꺼냈다. 빵 하나를 사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와 긴 줄에 선다는 이야기였다. 대전 시민인 나에게 그것은 늘 보아오던 풍경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말 속에서 그 빵집은 어느새 작은 순례지가 되어 있었다. 익숙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목적지가 된다는 사실이 조금은 낯설고, 또 조금은 흥미로웠다.얼마 전 장항의 솔숲을 걷고 돌아오는 길에 한 아구탕 집을 ..

시나브로 2026.03.09

발자국의 노래

발자국의 노래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몸을 옮기는 일이 아니다. 나는 가끔 그것을 삶을 낮은 불에 천천히 달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서두르지 않고 하루의 시간을 우려내며, 흩어진 생각들을 조용히 가라앉히는 방식 말이다. 내가 거의 매일 걷는 관평천 산책길에도 그런 시간이 흐른다.길 위에는 늘 여러 가지 발자국 소리가 있다. 혼자 걷는 이의 고요한 걸음, 나란히 보폭을 맞춘 부부의 느린 발걸음, 커피잔을 들고 지나가는 직장인의 빠른 걸음, 강아지와 함께 여유롭게 걷는 산책의 걸음. 서로 다른 보폭들이 모여 하나의 리듬을 만든다. 나는 그것을 관평천의 작은 교향곡이라고 생각한다.날씨는 이 길의 조용한 지휘자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알록달록한 우산들이 꽃처럼 피어나고, 볕이 좋은 날에는 챙 넓은 모자들이 길 위에 ..

시나브로 2026.03.06

카페 심리학

카페 심리학3월이다. 봄의 전령을 맞이하고 싶어 남쪽으로 길을 잡았다. 매화 꽃구름 아래 북적이는 인파 대신 선택한 곳은 고요한 지리산이었다. 남원을 지나 육모정에 이르니 결빙 구간이라는 입간판이 길을 막고 있었지만, 반대 차선은 열려 있었다. 가라는 것인지, 가지 말라는 것인지 모호했다. 법과 현실 사이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앞서가는 몇 대의 차량을 따라 천천히 길을 올랐다. 구불구불 이어진 길에는 눈이 이미 녹아 있었고, 대신 촉촉한 봄의 기운이 땅 밑에서 차오르고 있었다.정령치로 향하던 길, 갑작스러운 생리현상 때문에 방향을 돌렸다. 지리산 품 안의 너른 벌판이 마음을 푸근하게 풀어주는 운봉고을이다. 급히 눈에 띄는 카페를 찾았는데, 조용한 시골 거리 한복판에서 그곳만은 유난히 활기가 넘쳤다. 낯설면..

시나브로 2026.03.03

개미들의 합창

개미들의 합창 - 파도 위를 유영하는 작은 돛단배코스피의 곡선이 봄날의 폭죽처럼 화려하게 터져 오릅니다. 그 눈부신 빛에 매료된 수많은 '개미'들이 불나비처럼 모여듭니다. 시장은 축제의 광장인 동시에, 탐욕과 공포가 소용돌이치는 치열한 전장입니다. 이 현란한 장세 속에서 개미들은 저마다의 작은 날개를 퍼덕이며, 그 빛의 끝이 화려한 낙원일지, 혹은 덧없는 허무일지 알지 못한 채 날아오릅니다. 주식 시장은 인간의 가장 솔직한 얼굴이 드러나는 무대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 존 스타인벡은 "돈은 비료와 같다. 뿌려지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말했지만, 정작 그 비료를 뿌리는 우리의 마음은 늘 가뭄과 홍수 사이를 오갑니다. 세계 정세의 불안함이 일상처럼 스며든 오늘날, 주식 투자는 거대한 파도..

시나브로 2026.03.01

대박의 심리학

대박의 심리학 - 텅 빈 박 속에서 길을 잃다“대박!”오늘날 한국인의 입술 끝에서 가장 자주 번뜩이는 감탄사다. 길모퉁이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한 입 베어 물 때도, TV 속 오디션 참가자가 고음을 뚫고 나올 때도, 여행 중에 뜻밖의 풍경을 만났을 때도 우리는 반사적으로 이 말을 내뱉는다. 마치 리모컨의 ‘즐겨찾기 버튼’처럼, 어떤 상황이든 눌러버리면 딱 맞는 반응이 튀어나오는 것이다.그러나 이 단어의 뿌리를 더듬어보면 흥미롭다. 조선 시대 도박판에서 큰 판돈을 따는 것을 ‘대박(大博)’이라 불렀다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고, 흥부전 속 박에서 터져 나온 금은보화처럼 큰 행운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 그렇게 태어난 ‘대박’은 점차 행운과 성공을 아우르는 말로 자리 잡았다.오늘날의 풍경은 더욱 다채롭다...

시나브로 2026.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