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브로

달팽이 뿔

경산 耕山 2026. 3. 24. 13:16

달팽이 뿔 

오래 전의 일이다. 출근하는 직장의 복도는 어둡고 조용했다. 아침인사를 건네도 눈을 피하는 동료들...... 사무실은 봄바람 대신 찬 공기가 흘렀다. 직장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일이 아니었다. 관계였다. 어느 편에 서지 않으면 설 자리가 없어지는 분위기, 말을 삼키는 동료들이 늘어나는 환경. 서로의 시선을 피하는 순간들이 반복되면서 조직은 조금씩 굳어 갔다. 그곳에서 중용의 자리는 점점 좁아졌고, 조직 내에서 중심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두 세력간의 갈등은 생활의 불편을 넘어 삶의 리듬을 흔들었다. 출근길은 지루해졌고, 아침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지쳐 있었다.

그때 내 스스로 읊조리던 시 한 구절이 있었다.

蝸牛角上爭何事(와우각상 쟁하사) 달팽이 뿔 위에서 무슨 일로 그리 다투는가
石火光中寄此身(석화광중 의차신부싯돌 번쩍이는 순간에 이 몸을 맡길 건가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술잔을 앞에 두고 읊었다는 시이다. 달팽이의 뿔처럼 좁은 세계에서 서로 다투는 인간의 모습, 그리고 부싯돌 불꽃처럼 짧은 인생.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쓴 웃음이 난다. 그렇게 치열하게 다투는 일들이 사실은 얼마나 좁은 세계 속의 싸움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떠올리면 또 하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리스 신화의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다. 그는 강력한 힘을 지녔지만 세상을 한쪽 눈으로만 본다. 그는 시야가 좁은 존재다. 어쩌면 그 모습은 인간 사회의 또 다른 초상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사회를 돌아보면 사람들은 점점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듯하다. 서로 다른 생각을 이해하기보다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려 한다. 듣기보다 말하기가 먼저이고, 질문하기보다 단정이 앞선다. 귀는 닫히고 목소리는 커진다. 그렇게 사회는 조금씩 외눈박이가 되어 간다.

세상은 한쪽 눈으로 볼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동양의 고전은 오래전부터 음양의 조화를 말해 왔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물이 있으면 불이 있다. 양지와 음지가 함께 있어야 생명이 유지된다. 수레가 바퀴 하나로 굴러갈 수 없듯, 사회도 하나의 시각만으로는 균형을 유지할 수 없다. 서로 다른 생각을 인정하는 일, 낯선 의견 속에서 배울 것을 찾는 일. 그것이 공자(孔子)가 말한 중용의 지혜일 것이다.
장자(莊子)도 인간이 얼마나 좁은 세계 속에서 다투는 존재인지 우화로 이야기했다. '달팽이 뿔' 위의 나라들이 서로 전쟁을 벌인다는 이야기다. 읽고 있으면 웃음이 나지만, 곧 그 웃음은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결국 고전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세상을 한쪽 눈으로 보지 말라는 것.
다툼은 생각보다 작고,
인생은 지나고 보니 짧다는 것.

지혜는 언제나 균형 속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중용의 지혜다. 밤과 낮이 함께 하루를 이루듯물과 불이 서로를 견제하며 생명을 지키듯사람의 사회도 서로 다른 목소리가 어우러질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내가 몸담았던 직장의 갈등도 그런 균형을 잃은 순간들이었을 것이다. 동료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이해하기보다 먼저 진영을 선택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니 한 가지 사실만 또렷이 남는다.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던 일들이 지금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세월은 많은 것을 지워 버린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은 남는다

우리는 과연 두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가. (한쪽 눈으로 보면 세상은 단순하다.)

두 눈으로 보면 세상은 조금 더 넓어지고, 조금 더 깊어진다. 문명은 그 두 눈을 뜨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달팽이 뿔 위에서 벌어지는 다툼을 내려다보듯, 인간의 삶도 조금 더 멀리서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는 조금 덜 다투고, 조금 더 이해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두 눈으로 보는 일,  같음은 공유하고 다름은 존중하는 일, 그것이 고전이 건네는 가장 조용한 가르침이 아닐까 싶다.

'달팽이뿔 위의 싸움' 《장자(莊子)》 칙양편(則陽篇)에 나오는 고사
그리스 신화 오디세우스 모험에 등장하는 외눈박이 키클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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