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기행

글씨를 따라 떠난 남도 기행

경산 耕山 2025. 9. 13. 12:01

글씨를 따라 떠난 남도 기행

차가운 바람이 산사의 처마를 스치던 그해 겨울, 우리는 붓끝에 담긴 마음을 따라가는 특별한 여행을 시작했다. 이번 기행의 주제는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었다. 눈 대신 겨울바람이 나뭇잎을 흩날리는 길, 해남 대흥사, 강진 다산초당과 백련사, 그리고 원교의 흔적이 남은 신지도를 찾았다. 그곳에는 붓 한 자루에 자신의 신념과 울분을 담아냈던 명필들의 친필과 숨겨진 이야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명필들의 경연장
해남 대흥사는 명필들이 붓으로 경연을 벌인 성지라고 할까? 조선 후기 서예를 이끌었던 명필들의 붓이 격렬하게 부딪치고 서로를 품었던, 역동적인 예술의 무대였다.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여초 김응현 . 그들의 글씨는 건물의 이름으로 붙인 단순한 현판을 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사상과 인격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대흥사는 사찰의 구조부터 특이했다. 명필들의 글씨는 이리저리 발품을 팔아야 발견하는 숨은 보물찾기 같은 재미가 있었다. 먼저 원교의 대웅보전부터 더듬기로 했다. 일주문을 지나 개울 건너에 자리한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에는 원교 이광사의 글씨가, 대웅보전 오른편 건물에는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추사 친필 편액이 방향을 달리해서 걸려 있다.
대흥사에서 동국진체와 추사체를 만나는 감동은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와 고요한 호수를 동시에 마주하는 느낌을 받았다. 원교의 동국진체는 유배의 울분과 강한 기개가 붓끝에서 터져 나오는, 격정적인 파도와 같다. 그의 글씨는 거침없이 살아 움직이며, 보는 이의 마음을 뒤흔드는 거대한 에너지로 다가온다. 반면,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는 깊은 사유와 절제가 응축된 고요한 호수와 같다. 붓끝의 강철 같은 힘을 억누른 듯한 절제미는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 대신 내면의 깊은 품격을 보여준다. 그 담담한 먹빛 속에서 제주 유배길의 고통을 넘어선 성찰과 평화가 느껴진다. 한자리에서 이처럼 상반된 두 예술혼을 만나는 것은 뜨거운 불과 차가운 얼음이 공존하는 기적을 보는 듯하다. 두 거장의 예술적 만남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한 감동을 선사한다. 강한 기개와 고졸한 품격이 한 공간에 어우러져, 조선 서예사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펼쳐 보인다.
두 명필의 글씨는 대조적이면서도 상대를 인정했던 그들의 관계를 보여준다. 추사는 원교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을 보고 조선의 글씨를 망친 해괴한 글씨라고 혹평했지만, 제주 유배 후, 초의선사에게 자신의 무량수각 편액을 떼고 다시 원교의 글씨를 걸어달라 요청했다는 일화는 두 거장의 예술적 자존심과 추사의 원교에 대한 존경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준다. 이 밖에도 대흥사 편액들 중에는 원교의 <천불전(千佛殿)>,<침계루(枕溪樓)>는 눈길을 끄는데,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써주었다는 <一爐香室>은 문이 잠겨 확인할 수 없었다. 글씨는 그 사람의 인격과 학문을 닮는다는 추사의 말처럼, 대흥사의 현판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속삭이고 있었다.

실학의 정신이 붓끝에 맺히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은 겨울의 정취가 물씬 풍겼다. 앙상한 가지에 바람이 차다. 다산초당은 다산이 18년의 유배 생활 동안 수많은 저서를 남긴 실학의 산실이다. 이 고즈넉한 공간에서 우리는 다산과 추사의 만남을 확인했다.
<다산초당)(茶山草堂> 현판은 추사의 글씨이지만 추사가 직접 쓴 글은 아니고 후대에 다산초당을 중수하면서 추사의 글씨를 모아 만든 것이다. '추사체' 특유의 절제된 기운과 품격이 실학의 정수와 교차하며 깊은 울림을 전한다. '붓은 도를 담는 그릇'이라 여겼던 다산의 정신이 추사의 붓끝을 통해 재탄생한 듯했다. 추사의 친필은 동암의 현판에서 만날 수 있었다. 동암은 다산이 손님을 접대하고 학문을 교류했던 공간이다. 동암에는 현판 두 개가 걸려 있다. 다산 친필 <다산동암(茶山東庵)>과 추사 친필 <보정산방(寶丁山房)>이다. 다산초당 동암에 걸려 있는 다산과 추사의 친필 현판은 두 거장의 학문과 예술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꽃피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증거이다.
<다산동암(茶山東庵)> 편액은 다산의 단정하고 절제된 필체를 집자한 것으로, 실학자의 학문적 엄정함과 도덕적 수양이 담긴 정직한 스케치와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유배 중에도 흔들림 없는 정신적 중심이 느껴진다. 획 하나, 글자 한 자에서 허투루 쓴 부분이 없으며, 다산의 붓놀림은 다산의 학문처럼, 붓끝에 담긴 실천적 정신과 고결한 인품이 느껴진다. 다산에게 글씨는 예술적 유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담아내는 도구였던 것이다.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예서체에 전서의 멋을 더한 농익은 수묵화와 같다. 추사체 특유의 담백하고 고졸한 맛이 응축되어 있으며,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우면서도 깊은 내공을 보여준다. 글자 획의 굵기, 먹의 농담, 그리고 전체적인 구도에서 느껴지는 농익은 아름다움은 글씨를 넘어 한 폭의 예술 작품을 보는 듯한 감동을 준다. '정약용(丁)을 보배롭게(寶) 받드는 산속의 집(山房)'이라는 이 편액은 추사가 다산을 깊이 존경했던 마음을 담은 헌사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동암의 두 현판은 한 공간에서 다산의 실학적 글씨와 추사의 예술적 글씨를 동시에 감상하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학문은 곧 글씨'였던 조선시대 선비들의 정신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구현된 것을 보여주는 증표이기도 하다.

울분이 예술이 되다
다산초당 옆자락에 위치한 백련사는 강진 벌판과 앞바다가 한눈에 조망되는 전망대 같은 사찰이다. 이 절집에 원교의 글씨와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가 전한다. 특히 원교의 글씨 <대웅보전(大雄寶殿)><만경루(萬景樓)>는 글씨를 아는 이의 눈을 흐뭇하게 한다. 다산이 "꿈틀대는 용의 기세"라 평한 <만경루(萬景樓)> 편액은 동국진체의 역동성과 힘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다. 글자 한 자 한 자가 마치 살아있는 듯한 생동감을 준다. 획은 굵고 거침없으며, 붓끝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물결체 필치는 유배자의 울분과 강한 생명력을 담아냈다. '()'자의 힘찬 시작과 '()'자의 파격적인 구성, 그리고 '()'자의 견고함은 글씨 전체에 솟구치는 기운을 불어넣는다. 이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려 했던 원교의 예술적 해방감을 보여주며, 보는 이로 하여금 붓이 춤추는 듯한 흥취를 느끼게 한다.
<만경루(萬景樓)>의 글씨가 역동성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면, <대웅보전(大雄寶殿)> 편액은 동국진체의 또 다른 면모인 정제된 완숙미를 보여준다. 이 글씨는 만경루보다 구조적으로 안정되고 정갈한 느낌을 준다. 힘찬 획은 여전하지만, 각 글자의 짜임새가 더욱 견고하고 조화로워 전체적으로 무게감 있는 품격을 지니고 있다. 백련사의 중심 법당에 걸린 만큼, 불교적 사유와 고매한 정신이 글씨에 스며들어 고요한 위엄을 느끼게 한다. 만경루가 '젊은' 원교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담고 있다면, 대웅보전은 그의 예술이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노련함'을 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 글씨의 운치는 격정과 고통을 넘어선 평온함과 깊은 아름다움에 있다. 어찌 보면 글씨는 고통 속에서 피어난 꽃이다. 붓을 들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고독과 성찰이 아름다운 필체로 남았다는 사실이 우리를 숙연하게 했다.

고독이 꽃피운 예술, 동국진체
신지도의 겨울은 고요했다. 바람 한 점 없는 바다를 끼고 굽이치는 길, 그 끝에 닿은 곳은 낯선 따뜻함을 지닌 섬, 그곳이 바로 원교 이광사의 마지막 유배지였다. 명사십리해수욕장으로 길을 잘못들어  현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원교가 누구냐고 반문한다. 글씨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원교는 낯선 인물이었다. 23년간의 유배. 영조의 경신처분으로 역적의 가문으로 낙인이 찍힌 채, 과거 응시조차 금지된 삶. 그러나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그 붓은 절망을 깎아내고, 고통을 갈아 만든 먹물로 새로운 길을 그렸다. 이곳 신지도에서 그는 자신의 예술혼을 완성했고, 그 흔적은 남도의 수많은 사찰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신지도에 들어서자 '원교 이광사 거리'라는 이름이 반가웠지만, 정작 거리는 고요했다. 그가 머물렀던 적거지조차 굳게 문이 닫혀 있었다. 잊혀 가는 한 예술가의 쓸쓸한 자취 같아 마음 한켠이 시렸다. 그러나 그의 예술혼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신지중학교 담벼락에 걸린 그의 글씨들은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했다. 그중에서도 대흥사 <침계루(枕溪樓)> 편액은 유배자의 외로운 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듯했다. 그 흐름이 매우 자유롭고 필획의 생략과 연결이 많아 초서와 행서를 결합한 독특한 필체다. ''''의 획이 물 흐르듯 이어지고, ''의 획은 파격적으로 길게 뻗어 있어 글자 전체에 감성적이고 역동적인 기운을 불어넣는다. 획 하나, 글자 한 자에 깃든 감성과 사유는 보는 이의 마음을 고요히 적셨다.
원교에게 글씨는 "()는 마음의 그림자요, 뜻의 흔적"이었다. 붓으로 자신의 인격과 철학을 증명하려 했다. 중국 중심의 서법을 거부하고 조선의 미감을 담아낸 그의 동국진체는 바로 그러한 그의 굳건한 신념이 빚어낸 결정체였다. 유배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조선의 글씨가 동국진체였다.
나주괘서사건에 연루되어 완도 신지도로 이배된 그는 73세의 나이로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신지도는 그가 동국진체를 완성한 마지막 장소이자, 그의 고독한 삶의 종착역이었다. 유배지에서 남도의 사찰들은 그에게 붓을 들 수 있는 유일한 무대이자, 덧없는 세상에서 잠시나마 정신적인 안식을 얻을 수 있는 피난처였다. 대흥사, 백련사, 천은사, 선운사, 내소사 등 남도 곳곳에 남은 그의 수많은 편액들은 고난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한 예술가의 깊은 사유가 담긴 역사적 유산이다.
신지도 기행은 잊혀져 가는 한 예술가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일이었다. 그의 흔적은 쓸쓸했지만, 붓끝에 담긴 그의 신념은 바람보다 차고, 바위보다 강하게 남아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겨울의 남도에서 만난 그의 글씨는 곧, 시대를 넘어선 한 사람의 삶과 교감하는 감동적인 여정이었다.

해남 대흥사 원교 친필 대웅보전
해남 대흥사 원교 친필 침계루

 “시냇물에 베개를 베고 기대는 누각”, 즉 자연과 하나 되어 휴식하고 명상하는 공간을 뜻한다.
이 표현은 자연 속에서 마음을 쉬고 도를 닦는 선의 공간을 의미한다. 물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씻고, 세속을 떠나 고요함을 즐기는 이상적 장소를 그린 것이다.

해남 대흥사 원교 친필 천불전
추사의 무량수각 위의 편액은 제주 유배 전의 글씨이고 아래 편액은 제주 유배 이후의 글씨다.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써준 일로향실

추사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써준 「일로향실(一爐香室)」 편액은  두 사람의 깊은 교유와 선(禪)·차(茶)·예술이 어우러진 정신적 공간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하나의 향로가 놓인 향기로운 방”이라는 뜻으로, 선(禪)의 수행 공간이자 차향이 가득한 명상의 방을 의미한다.

추사가 직접 쓰지 않고 추사의 글씨를 모아 집자한 편액

「다산 동암」 편액은 다산의 단정하고 절제된 필체를 집자한 것으로, 실학자의 학문적 엄정함과 도덕적 수양이 담긴 근엄한 분위기를 준다. 유배 중에도 흔들림 없는 정신적 중심이 느껴진다.

「보정산방」은 "정약용(丁)을 보배롭게(寶) 받드는 산속의 집(山房)”이라는 의미이다. 추사 김정희의 예서체에 전서의 멋을 더한 유려하고 아정한 필치로, 글자 구성에 운치와 여백의 미를 살려 예술적 감성과 여유를 드러낸다. 

강진 백련사의 만경루, 물결체 특유의 힘과 생명력이 느껴진다.
백련사 대웅보전 동국진체의 완성을 보여주는 원교의 대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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