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로 읽는 풍경
- 경포대 <第一江山>
편액은
정자에 걸린 시인의 표정
붓끝은 바람 같고
먹빛은 물결처럼 흐른다
휘어진 자취는 바람에 흔들린 갈대 같고
빠른 숨결은 춤추는 발끝 같아
묵향이 번진
그 사이로 풍경이 살아난다
한 획에 숨을 실어
한 숨에 마음을 담아
붓끝을 따라 흐르니
글씨는 산이 되고
여백은 강이 되어
관동제일풍경이
내 안에 피어난다
경포대의 달빛이 시가 되고
바람은 노래가 될 때
술잔과 눈동자에
풍류가 조용히 스며든다


글씨로 읽는 풍경
경포대에 오르니, 바람은 차갑고 호수는 숨을 죽인다. 그 고요 속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붙드는 것은 정면에 걸린 편액, 〈第一江山〉이다. 간결한 네 글자지만, 그 안에는 강릉의 자부심과 풍류, 그리고 천년을 넘는 서예의 숨결이 담겨 있다.
이 편액의 글씨는 중국 북송의 명필 미불(米芾, 1051~1107)의 작품을 탁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가 남긴 〈第一山〉이라는 글씨는 중국의 명산들에 새겨졌던 석각으로, 산수의 으뜸을 상징하는 문구였다. 이 글씨가 조선에 전해지면서, 관동팔경 중 으뜸이라 자부하던 경포대에 걸맞은 상징으로 선택된 것이다.
편액의 유래는 조선 후기 평양의 연광정에서 시작된다. 당시 연광정에 미불의 〈第一山〉을 탁본해 걸었고, 여기에 ‘江’ 자를 덧붙여 ‘第一江山’이라는 문구가 완성되었다. 이는 강과 산이 어우러진 으뜸 풍경이라는 뜻으로, 경포대의 자연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현재 경포대에 걸린 편액은 1953년 복원 과정에서 ‘江’ 자가 분실되어, 신원 미상의 서예가가 새로 써 넣은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이 편액은 미불의 필치와 무명의 붓끝이 공존하는 독특한 작품이다. 글씨를 바라보면, 첫 획부터 단호하다. 붓끝은 바람 같고, 획은 물결처럼 흐른다. 미불 특유의 비틀림과 속도감, 그리고 획 사이의 긴장과 여백은 이 글씨를 하나의 풍경으로 만든다.
경포대는 강릉의 풍류와 산수, 문인의 정신이 깃든 공간이다. 편액은 그 정신을 응축한 상징이며, 미불의 글씨는 그 자체로 예술적 권위와 역사적 깊이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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