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낭만, 기차여행
루체른역에서 바라보는 호수는 한 폭의 풍경화 같은 느낌이었다. 호수의 에메랄드빛 물결은 햇살을 받아 잔잔하게 반짝이고, 그 위로 하얀 유람선들이 제 갈 길을 오고간다. 호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리기(Rigi)와 필라투스(Pilatus)는 마치 도시의 수호신인 양 굳건히 서 있었다. 리기산은 부드러운 능선과 푸른 초원을 자랑하며 ‘산들의 여왕’으로 자리하고, 반면 필라투스산은 거친 바위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솟아 있어 ‘용의 산’이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위압적인 기운을 풍겼다. 이 두 산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루체른의 하늘을 떠받치고 그 아래에는 호수라는 거대한 평화가 흐르고 있었다. 루체른의 모습은 삶의 양면성처럼, 부드러움과 강인함이 공존하는 풍경이었다.
루체른역에 들어서자, 국제공항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중국인, 일본인 단체 관광객들이 시끄럽게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프랑스 청년들은 자유분방한 애정을 표현한다. 커다란 배낭을 멘 독일인 가족과 조용히 노선도를 살피는 아랍인 부부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 알프스라는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모인 모습은 그 자체로 인간 시장이었다. 루체른-인터라켄 익스프레스 노선은 스위스에서도 손꼽히는 절경 루트라고 소문이 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노선은 사철 여행자들로 붐빈다.
나는 1등석 기차에 몸을 실었다. 안락한 좌석과 넉넉한 다리 공간은 쾌적하고 만족스러웠다. 큰 창 밖으로는 푸르른 여름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마치 움직이는 고급 라운지처럼, 1등석은 여유와 낭만을 동시에 선사했다. 기차는 호수를 따라 천천히 달린다.
먼저 평화롭고 넓은 수면 주변에 숲과 초원이 자리한 호수가 반긴다. 자르넨 호수라고 한다. 한가롭고 부드러운 울림으로 여행의 서막을 열어준다. 첫 페이지를 넘기는 고전 소설처럼, 조용한 감동이 스며드는 호수였다. 룽게른역을 지나자, 에메랄드빛의 룽게른 호수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그 호수를 따라 이어진 마을의 목조 주택들은 동화 속 풍경 그 자체였다. 고딕 첨탑의 교회당은 마을의 중심에서 조용히 시간을 지키고 있고, 호숫가의 예쁜 공동묘지는 삶과 죽음이 함께 숨 쉬는 공간으로, 이곳의 평화로움을 더욱 깊게 만든다. 산비탈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 문화, 그리고 험난한 자연 속에서 피어난 목가적인 평화는 알프스가 만들어낸 또 다른 문화적 현상이었다. <사랑의 불시착>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다고 해서 관심있게 감상했다. 드라마를 보지 않았지만 호숫가 벤치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거나, 피크닉을 즐기며 하루를 보내기에 딱 좋은 드라마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이젤발트 마을을 지날 땐, 브리엔츠 호수의 옥색 물결이 창가로 쏟아져 들어왔다. 브리엔츠는 거대한 거울이었다. 그 깊이와 색감은 알프스를 비추는 자연의 자화상이었다. 호숫가에 다소곳이 자리한 그림 같은 목조 주택들은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에메랄드빛 브리엔즈 호수 곁에 자리한 마을들은 물빛을 닮은 평온한 모습이었다. 스위스의 전원은 정적 속에 생동한다. 초록빛 들판 위에 점점이 박힌 스위스 농가 창고들은 마치 오래된 동화책의 삽화처럼 정겹다. 그 너머로 펼쳐지는 산악 지형은 호수와 어우러져, 인간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조화의 미학을 보여준다. 카라반 캠핑촌에서는 여행자들이 잠시 삶을 멈추고 자연과 함께 호흡을 하고 있다. 그들의 텐트와 캠핑카는 이 풍경 속에 스며들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하얀 돛단배 한 척이 잔잔한 물살을 가르며 지나간다. 호숫가에서는 사람들이 물 위를 헤엄친다. 그 모습은 자연과 인간이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이상적인 풍경처럼 느껴진다.
우리나라의 기차가 정시성과 속도를 중시하는 '달리는 시간'이라면, 스위스 기차는 자연 속으로 '흐르는 시간'에 가까웠다. 특히 스위스의 기차는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환승 시스템이 독특하다. 복잡한 노선도에도 불구하고 모든 기차가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고 출발하며, 심지어 몇 분 안에 다른 기차로 갈아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모든 열차가 자연의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듯했다.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조차 조급함 없이, 다음 풍경을 기대하게 만드는 여유가 있었다. 알프스는 스위스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빚어낸 거대한 존재였다. 험준한 산악 지형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밀한 기계, 산을 깎아 만든 터널과 기차 노선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전과 경외를 동시에 보여주었다.
괴테는 “자연은 신의 예술이다”라고 말했다. 루체른에서 인터라켄까지의 여정은 그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전시회와 같았다. 차창 밖의 풍경은 시시각각 달리했다. 새로운 풍경은 시각의 축제였다. 여행은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 그 자체였다. 이 구간에서는 각기 다른 성격의 호수들이 차례로 등장하며 여행자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세 호수는 기차 여행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풍경의 3악장이었다.
아름다움은 종종 사소한 것에서 온다고 했던가. 스위스 전원의 소소한 여름 풍경은 그 자체로 예술이었다. 기차의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간 수많은 풍경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영원히 새겨진 채, 앞으로의 삶에 깊은 울림을 줄 것이다. 호수 위를 흐르는 안개처럼, 삶도 늘 새로운 풍경을 보여준다. 삶의 여정이란, 이 기차처럼 멈추지 않고 흘러가지만, 그 속에서 만나는 순간순간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깨달음에 잠길 때쯤, 기차는 정확한 시간에 인터라켄 동역에 도착했다.






'해외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천상의 식탁 (6) | 2025.08.27 |
|---|---|
| 소리와 그림의 여정 (8) | 2025.08.25 |
| 더블린 연가 (21) | 2025.07.18 |
| 더블린 애가(哀歌) (6) | 2025.07.17 |
| 에딘버러 성에서 (5) | 2025.0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