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 애가(哀歌)
하프 모양의 사무엘 베케트 다리 아래 리피강은 더블린을 조용히 가로지른다. 그 잔잔한 물결 위에 한 척의 배, ‘지니 존스턴(Jeanie Johnston)호’가 바라보인다. 돛줄에 묶인 깃발들이 낮게, 높게, 강하게, 약하게 멜로디처럼 바람에 펄럭인다. 낯선 나라의 강가에서 나는 하모니카를 꺼내 들고 연습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오래전에 나는 하모니카를 배웠다. 하모니카를 불게 된 동기는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그 나라 사람들과 어울릴 때 그 나라 민요 한 곡조를 연주하고 싶은 꿈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때 처음으로 배우고 연습한 노래가 '아, 목동아'로 번안된 “Danny Boy”였다. 하모니카를 연습할 때는 생각 없이 구슬픈 곡조만으로 읊조렸다. 목가적이고 순수한 이별의 노래로 알고 그 껍데기만 이해하고 있었다. 그 속엔 역사의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까지는 몰랐다. 본고장 더블린에 와서야 ‘대니 보이’ 관련 아일랜드의 슬픈 이별과 죽음의 서사를 제대로 들었다.
아일랜드는 12세기부터 800년 가까이 잉글랜드의 식민 지배 아래 고통스럽게 살아왔다. 1845년, 아일랜드를 덮친 감자잎마름병은 식민지 생활의 설상가상이었다. 몇 해 사이, 일백만 명이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감자 대기근이 절정이던 시절, 수많은 아일랜드인들은 지니 존스턴호를 타고 살 길을 찾아 미국, 캐나다, 호주 등지로 떠났다.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두고 떠나며 그들을 전송하던 노래가 바로 “Danny Boy”였다.
“Danny Boy” 가사 (번안)
아, 목동들의 피리 소리들은 산골짝마다 울려 나오고
여름은 가고 꽃은 떨어지니 너도 가고 또 나도 가야지
저 목장에는 여름철이 오고 산골짝마다 눈이 덮여도
나 항상 오래 여기 살리라
아, 목동아 아, 목동아 내 사랑아
그 고운 꽃은 떨어져서 죽고 나 또한 땅에 죽어 묻히면
나 자는 곳을 돌아보아 주며 거룩하다고 불러 주어요
네 고운 목소리를 들으면 내 묻힌 무덤 따뜻하리라
너 항상 나를 사랑하여 주면
네가 올 때까지 나는 평화롭게 잠들리
아일랜드 사람들은 끝없이 식민 지배에 저항했다. 전쟁터에 나가는 자식을 배웅하며 이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내 아들 대니야,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라’는 부모의 쓰라린 심정과 간절한 소원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며, 언젠가 돌아올 날을 기다린다. 전쟁터에 나간 아들에게 보내는 아버지의 유언으로 읽히기도 한다. “Danny Boy”는 아일랜드의 눈물이며, 이별가였다. 이별은 발끝에서 시작되어 가슴으로 번졌다.
우리 민족 또한 일본의 식민 통치 아래 해마다 보릿고개를 넘겨야 했다. 모진 목숨 부지하기 위해 만주, 연해주, 미국, 멕시코… 그들은 고향을 등지고 생존을 위해 떠나야했다. 떠나는 마음 속에는 늘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타국으로 떠나게 된 우리의 아픔과 아일랜드의 이민 정서가 다르지 않았다. 아일랜드의 눈물은 우리의 한(恨)의 정서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슬픔을 딛고 일어서는 강인한 민족정신마저 동질감을 느끼게 한다. 아일랜드의 감자, 한국의 보리. 식민 통치와 민족의 생존, 가난은 이름이 달라도 똑같은 고통이었다. 대니 보이처럼 이때 불렀던 우리의 노래가 아리랑이었다. 때때로 TV에서 보게 되는 중앙아시아에 거주하시는 고려인들이 부르는 아리랑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지 않는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청천 하늘에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에 수심도 많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일랜드의 작곡가 리처드 파렐리(Richard Farelly)는 1950년에 “The Isle of Innisfree(이니스프리의 섬)”를 작곡했다.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향수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노래다. 이민자들에게 “이니스프리”는 실제 지명인 동시에,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이상향이기도 했다.
“The Isle of Innisfree” 가사 (리처드 파렐리)
나는 이니스프리 섬으로 돌아가리
푸른 들판과 파란 하늘이 있는 그곳으로
내 마음의 사랑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
우리가 알고 있는 예이츠의 시 '이니스프리 호도(The Lake Isle of Innisfree)'와 제목은 같지만 내용과 형식은 다르다. 예이츠의 ‘이니스프리 호도’는 1890년에 발표된 서정시로, 런던의 소음 속에서 고향의 자연과 평화를 그리워하는 전원적인 시인 반면, 1950년에 작곡된 파렐리의 곡은 타국에서 살아가는 이민자의 내면적 향수를 담아 고향의 자연, 가족, 그리고 잃어버린 평화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것이 예이츠의 시와 다르다. 파렐리의 노래와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린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을 떠올리며, 고국을 떠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노래를 비교하여 보았다.
더블린에서 낮 시간에는 리피강의 지니 존스턴호와 “Danny Boy” 를, 저녁에는 아일랜드 음식 문화를 온몸으로 체험했다.
“Danny Boy”는 학창시절에 배웠던 목가적인 민요가 아니었다. 음표 하나하나 마다마디 설움이 녹아든 애잔한 가락에 나는 잠시 아일랜드인이 되었다. 그 선율은 아일랜드의 슬픔이자, 모든 이별하는 사람들의 노래이며, 기억과 사랑을 잊지 않으려는 인간의 몸부림이었다.
더블린의 어느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즐긴 그들의 음식, 피시 앤 칩스와 기네스 맥주가 인상에 남았다. 피신 앤 칩스는 고소했고 흑맥주는 부드러웠다. 이것이 바로 더블린의 맛이었다. 더블린의 맛에서 은근한 정을 느꼈다. 더블린 사람들에 호감이 생겼다.
영국 산업혁명 시대의 노동자 음식인 피시 앤 칩스는 생선튀김 한 조각에 감자튀김 몇 개가 전부였다. 이 음식은 이민자들의 생존 음식이자, 노동자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지금은 영국을 대표하는 음식, 아일랜드의 일상 속에 자리한 세계 음식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과거의 아픔과 현재의 자부심을 동시에 담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기네스(Guinness)**의 본고장에서 마시는 흑맥주는 특별했다. 하프 문양 상표가 그려진 기네스는 크리미하고 벨벳 같은 거품이 기네스의 시그니처임은 맥주 애호가들은 잘 알고 있다. 아일랜드의 상징, 세계적인 브랜드 창업자 아서 기네스는 더블린 시민들에게 존경받는 사업가였다. 기네스의 깊은 맛만큼이나 창업자의 이야기도 풍부했다. 맥주 한 컵에도 아일랜드 정신은 그렇게 녹아 있었다. '거품의 시간, 119.5초'의 기다림 속에 “Danny Boy”를 읊조리며 검은 알코올로 흥건히 가슴을 적셨다. 이런 분위기에 하모니카 연주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하모니카를 챙겨오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