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내셔널 갤러리 관람기

경산 耕山 2025. 7. 11. 15:40

내셔널 갤러리 관람기

템즈강의 쾌청한 아침, 타워브릿지가 배경이 되는 런던탑 선착장에서 유람선에 올랐다. 물 위를 미끄러지듯 흐르는 배 위에서 바라본 런던의 풍경은, 과거와 현재가 어깨를 맞대고 앉아 있는 듯했다. 런던탑에서 빅벤까지 약 30여 분의 유람선 투어는 마치 시간의 조각들이 템즈강에 흘러들어, 나그네에게 조용히 속삭여 주는 역사수업 같았다.
유람선 투어에 이어 찾아간 대영박물관. 사전 예약까지 마친 일정이었지만, 뜻밖의 벽에 막혔다. 학생들의 체험학습 일정으로 일반 입장이 제한되었다는 대책없는 안내에 난감했다. 수소문 끝에 현지 가이드는 일행을 내셔널 갤러리로 안내했다. 예정에 없던 예술과의 조우! 갑작스레 미술관의 문이 내게 열렸다. 예정된 길 위에서 비켜선 행운이 오늘은 당신을 위한 날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사실, 대영박물관은 예전에 한 번 다녀온 곳이었기에 달리 흥미가 없었다. 여행을 신청할 때, ‘내셔널 갤러리가 아니고 왜 대영박물관인가?’하고 은근한 불만도 있었다. 나의 불만을 여행의 신이 알아들었는가.

내셔널 갤러리 관람은 그림 공부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목록에 오른 버킷리스트다.  캔버스 위에 살아 숨쉬는 명화들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우연히 찾아온 것이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내게 다가온 내셔널 갤러리는 이번 영국 일주에서 가장 큰 선물이었다.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영박물관에서 트라팔가 광장까지 15분을 걸었다. 하늘로 뻗은 하나의 대리석 기둥이 시선을 끌었다. 넬슨 제독 동상이다. 나폴레옹을 무찌른 트라팔가 해전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을 가장 존경했다는 인물이다. 넬슨 제독이 지켜보는 발 아래 예술의 문턱, 내셔널 갤러리는 자리했다. 어쩌면 넬슨 제독이 내셔널 갤러리를 안내하는 가이드처럼 느껴졌다.
내셔널 갤러리. 처음 마주한 그 모습은 고대 아테네의 신전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셔널 갤러리는 유럽 회화를 집대성한 공공 미술관이다. 1824년에 설립되어 약 2,300점 이상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13세기부터 1900년대 초까지의 주요 서양 회화가 전시되고 있다. 고흐, 렘브란트, 터너, 모네, 드가, 한스 홀바인, 르누아르 등 다양한 거장들의 명작을 감상할 수 있는 미술의 성지다. 입장료는 없고 누구나 자유롭게 예술과 만날 수 있다.

내셔널 갤러리의 방대한 규모를 생각할 때, 짧은 한 시간 안에 모든 작품을 만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어떤 작품을 먼저 마주할지 선택의 고민을 하게 되지만, 그 선택 자체가 이미 예술과의 깊은 교감으로 이어진다. 행복한 갈등 속에서, 그림을 만나는 순간보다 상상하는 감정이 더 설렜다. 전시실은 테마에 따라 여러 개의 방으로 나누어져 있다. 고흐의 방으로 가는 중에 낯익은 그림들을 잠깐잠깐 만나기로 했다. 먼저 램브란트의 자화상이 보인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앞에 조용히 발걸음을 멈추었다. 한 점의 눈빛으로 세월을 꿰뚫는 것처럼, 캔버스 너머의 렘브란트와 눈을 마주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롤러코스터 같은 그의 생애 중 가장 화려한 시절의 한 때를 보았다.
영국의 풍자화가 윌리암 호가스의 결혼 세태앞에서는 그림에 담긴 풍자와 상징을 읽었다. 명예가 필요한 부자와 가난한 귀족 간의 결혼 세태를 6장의 연작 그림은 부패와 위선을 꼬집는 풍자화다. 풍속화에 담긴 인간 군상은 주말드라마를 보는 듯 재미가 더했다모네가 1899년 지베르니 시절에 그린 수련괴 일본다리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빛과 색이 펼치는 시각적 향연이라는 인상파의 철학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그림이다. 인상파에 영향을 준 영국의 화가 터너의 대형 풍경화 달빛 아래 어부들의 인상도 강렬했다. 파도의 격정이 휘몰아치는 그의 예술정신이 화면 너머로 전해진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도 지나칠 수 없었다. ‘죽음과 신앙을 동시에 담아낸 이 작품은 정답도 없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르누아르의 행복한 인물들과 드가의 발레하는 여인들과는 제대로 대화하지 못했다. 고흐를 만나러 가는 마음이 바빴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44번 방은 인파로 붐볐다. 그 중심에는 고흐의 해바라기가 있었다. 내셔널 갤러리의 얼굴 해바라기, 색채로 감정을 표현하는 마술사 고흐 앞에 섰다. 물감이 튀어나올 듯한 질감, 노란색의 향연, 피어나기 직전의 해바라기부터 활짝핀 해바리기, 시들어가는 해바라기까지 15송이가 빈센트라고 쓴 화병에 복잡하게 모여 있다. 생명과 죽음이 공존하는 해바라기의 표정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림책에서 보던 바와 큰 차이는 없지만 실물영접이라는 느낌은 달랐다. 실물 그림의 질감 정도를 더 자세히 확인하고 싶었는데 그런 짬이 나에게 주어지지는 않았다. 해바라기 꽃송이가 14송이 같기도 하고 15송이로 보이기도 한다. 1888년에 아를에서 그린 15송이 해바라기 버전은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에도 있는데 이는 1889년에 고흐가 다시 그린 복제 그림이다. 반고흐미술관 해바라기에는 화병에 빈센트라는 이름이 없어 내셔널 갤러리의 해바라기와 구별된다.
남프랑스 아를에서 화가공동체를 꿈꾸며 고갱을 위해 그린 꽃이 해바라기였다. 고흐는 해바라기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드러냈다. 그림 속에는 희망과 꿈과 행복이 넘쳐흐른다. 고흐의 노란색은 따뜻한 감정의 언어였고, 해바라기는 그의 열정이 피워낸 빛이었다.
내 그림은 태양처럼 빛난다. 나는 해바라기를 통해 빛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 빛은 언제나 그림자를 동반한다.”
라고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그 빛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들어가는 꽃송이는 고갱과의 갈등과 결별을 예감한 천재의 영감일런지도 모르겠다. 그림 앞에 선 사람들은 저마다의 감정으로 이 꽃을 바라볼 것이다. 어떤 이는 생의 환희를, 어떤 이는 고독을 읽었으리라. 가이드는 이 그림을 행운을 가져다 주는 그림이라고 소개한다.

해바라기옆에 또 하나의 걸작,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은 고흐의 생 레미 시절, 정신병원 창문 너머의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해바라기가 고갱을 만나기 이전의 그림이라면,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은 귀를 자른(고갱과 결별) 후에 그린 그림이다. 사이프러스는 고흐에게 신성한 존재였던가 보다. 그에게 사이프러스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와도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어찌보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나무의 형상은 영원을 갈망하는 고흐의 외로운 모습을 닮기도 했다. 고흐의 편지는 그의 그림을 이해하는 데 있어 꼭 필요한 감정의 네비게이션 같다. 그의 편지를 읽으면 그림이 가슴으로 들어온다.
사이프러스는 항상 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다. 해바라기처럼 연작으로 그리고 싶다. 나는 슬픔과 극도의 외로움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나는 자연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느낀 감정을 그린다.”
라고 편지에 말한 것처럼 그의 붓질은 격렬하고, 색채는 감정을 폭발시키듯 강렬하다. 요동치는 하늘, 휘몰아치는 밀밭, 불꽃처럼 솟은 사이프러스는 고흐의 내면의 풍경을 그대로 드러냈다. 사이프러스는 불안과 열망을, 밀밭은 생의 마지막 황홀을, 하늘은 그의 질풍노도 같은 감정을 분출한 것이리라. 그림 속의 소용돌이는 소리없는 아우성이었으리라. 하늘, 밀밭, 사이프러스가 고흐의 감정을 투영하는 거울이었다면 캔버스 위의 색채와 붓질은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는 한 인간의 고백이 아니었을까? 이 그림 앞에 서면 고흐의 고독과 열정, 그리고 예술에 대한 절박한 사랑을 마주하게 된다.
집합 시간 2분 전이다. 그림들이 마음을 붙잡는데 발걸음은 뛰어야만 했다.
, 패키지여행의 슬픔이여!

런던 내셔널 갤러리
램브란트 초상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
호가스의 사회풍자 그림 <결혼세태>
초등학생들의 체험학습 장면
벨라스케스의 <거울 앞의 비너스>
터너의 <달빛 아래 어부들>
44번 방 고흐의 <해바라기> 앞
고흐의 <해바라기>
고흐의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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