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아를의 밤 풍경

경산 耕山 2025. 6. 22. 12:24

아를의 밤 풍경

카르카손에서 아를로 향하는 남프랑스 길은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따라 달리는 듯했다. 프로방스의 전원은 겨울에도 따스한 햇살 아래 부드럽게 물결쳤고, 들판에는 포도밭과 올리브나무가 낮은 언덕을 따라 펼쳐져 있었다. 아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론강이었다. 알프스에서 발원해 지중해로 흘러드는 이 강은 아를의 젖줄처럼 유유히 흐르고 있었고, 그 너머로는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일부 건물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검게 그을린 외벽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낡음이 고대도시의 품격을 더해주는 듯했다.
도시 중심에 자리한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은 아를의 역사적 상징이었다. 2천 년 가까운 세월을 견뎌낸 이 거대한 구조물은 지금도 투우 경기나 공연이 열리는 세계문화유산이다. 그 투박한 돌기둥을 만지며 고대 로마의 함성과 환호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며 내전을 결심했을 때, 주사위가 하늘 높이 던져졌을 때, 아를의 시민들은 그를 지지하며 병력과 자원을 아낌없이 보냈다. 그런 이유로 아를은 로마로부터 특별한 총애를 받았고, 카이사르는 그 보답으로 원형경기장을 특별 선물했으리라. 이 도시의 진정한 매력은 화려함보다는 고요한 품격에 있다. 햇살에 반짝이는 론강, 비옥한 토양 위에 펼쳐진 전원 풍경, 그리고 세월을 머금은 석조 건물들. 아를은 과거와 현재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고풍스러움이 숨 쉬는 그런 도시였다.
아를은 고흐의 영혼을 사로잡은 도시였다. 고흐의 열정이 마음껏 폭발할 만큼 매력있는 도시가 아를이 아니었던가. 아를의 겨울은 노르망디의 겨울과는 달랐다. 노르망디의 겨울은 회색빛 하늘 아래 푸른 초원과 끝없는 지평선, 그리고 겨우살이가 주렁주렁 매달린 참나무들이 인상적이었다. 그곳은 내 눈으로 본 것만 그린다는 사실주의 화가들의 고향이었다. 반면, 남프랑스의 아를은 겨울에도 따뜻한 햇살과 밝은 색조의 지붕들, 비옥한 토양과 론강의 유려한 흐름이 어우러진 목가적인 풍경이다. 고흐는 이곳에서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보다는, 감정과 열망을 색과 붓질로 표현했다. 실제 풍경을 바탕으로 하되, 색채와 형태를 과장하거나 왜곡하여 내면의 감정을 강조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나는 고대 로마의 시간 속에서 고흐와 함께 산책하는 기대감에 저절로 즐거워졌다.

숙소에서 체크인하는 중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진다. 겨울철에 비가 많은 지중해식 기후란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소나기는 그쳤다. 편안한 마음으로 나는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 야간 답사에 나섰다. 저녁 샤워를 마친 아를의 밤은 보름달이 산뜻한 시간이었다. 파리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빈센트 반 고흐, 남프랑스의 이 조용한 도시에서 얼마나 간절히 빛을 갈망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아를의 자연이 고흐의 닫혀 있던 영혼을 일깨운 것이다. 37년 고흐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에 그려진 그림을 따라 걷는 마음 가벼운 산책이다.
포름 광장에 도착하자, 노란색 차양이 드리워진 카페 반 고흐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그 유명한 밤의 카페 테라스의 배경이다. 그림 속 따뜻한 노란 조명과 짙푸른 밤하늘이 그대로 살아 있는 듯했다. 실제로 고흐는 이곳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밤은 낮보다 더 풍성한 색을 지닌다고 말했다. 나는 테라스 한 켠에 앉아, 전시된 그림을 보고 그가 보았을 법한 별들을 하나씩 세어보았다. 별빛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고흐의 희망은 푸른색이었고 행복은 노란색이었나 보다. 그림 속에 노랑과 푸른색의 대비로 고흐는 꿈을 밤하늘에 그려내지 않았을까.
조금 더 걸어 론강 강둑에 이르렀다. 고흐 최대의 걸작,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이 탄생한 바로 그곳이다. 강물 위로 별빛과 가스등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풍경은, 고흐가 그토록 사랑했던 색채의 교향곡이라고나 할까. 그는 이곳에서 밤하늘을 그리며 하늘은 청록색이고, 물은 로열 블루이며, 땅은 보라색이라 표현했다. 그 색들이 지금도 강물 위에 넘실넘실 춤추는 듯했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별밤 두 연인이 강변을 산책하는 모습을 보면 이 당시 고흐의 마음이 보인다.
라마르틴 광장에 있는《노란 집의 자리에 섰다. 2차대전의 폭격으로 지금은 사라지고 그 자리는 표지판과 재현된 그림만이 그 시절을 알려주고 있었다. 가난한 예술가의 꿈이 머물렀던 장소, 고흐가 화가 공동체를 꿈꾸며 고갱을 초대했던 노란 집, 두 화가의 열정과 충돌, 그후 고흐의 고통과 고독이 이 거리에 아직도 남아 있는 듯했다. 고갱에게 선물할 <해바라기> 그려가며 기다렸던 시절과 고갱을 만난 후의 고흐의 삶은 천당과 지옥이었으리라. 아이러니컬하게도 고갱과의 불화 이후,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절에 고흐의 명작은 쏟아졌으니 고갱을 어떻게 봐야할지 바라보는 시선이 혼란스럽다.

고흐의 <해바라기>

아를의 뜨거운 태양 아래
노란 이층집 창가에 앉아
고갱을 기다리며 그린 꿈

불꽃같은 그의 열정
주렁주렁 15 꽃송이
노란빛으로 피어났지

고단했던 외로움을 잊었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았지
기나긴 터널을 벗어나
한 줄기 햇살을 보았지

화병에 꽂힌 해바라기
뿌리 없는 아름다움이었지
노란 집에서 꿈꾸던 시간들.....
해바라기를 그리던 순간들.....

론강 위로 보름달이 떠올라 도시의 지붕들을 은빛으로 물들이고, 돌로 쌓은 담벼락엔 오래된 시간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아를의 골목길은 낮보다 더 섬세한 표정을 하고 있고, 사람들의 속삭임마저도 음악의 일부가 된 듯 조용히 배경으로 스며든다. 아를의 밤은 고흐의 밤 풍경만이 아니다. 알퐁스 도데의 소설 아를의 여인의 배경이 된 목가적 풍경이 바로 이 지역 프로방스이다. 조르주 비제는 알퐁스 도데의 아를의 여인을 같은 이름의 관현악 모음곡으로 작곡했다. 이 중에서 특히 제2모음곡의 3악장 미뉴에트는 플루트 연주곡 아를의 여인으로 매우 사랑받고 있다. 플루트의 맑고 청아한 음색이 아를 지방의 따뜻한 햇살과 고풍스러운 정취와 목가적이고 우아한 분위기에 젖어들게 한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 고흐의 그림 속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아를의 밤을 되새겨 보았다. 고흐도 이 자리에 앉자 카페의 여주인 <아를의 여인>을 그렸을 것이다. 우체국 제복 차림을 한 우체부 <조셉 룰랑>의 초상화도 그려주었으리라. 알퐁스 도데도 이 카페에서 프로방스의 아름다운 별밤 이야기를 구상하지 않았을까? 조르주 비제도 여기에 와서 도데의 소설을 각색하며 플루트 연주곡 아를의 여인을 작곡했겠다.  돈 맥클린도 이곳에 머물며 고흐를 추억하는 노래 <빈센트>를 불렀으리라 는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내게 아를의 별밤은 이들과 함께 겹겹이 쌓인 시간의 층계를 오르내리는 느낌이었다. 이 밤은 아마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이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마음 깊이 간직한 채. 양치기 목동이 아름다운 스테파네트 아가씨와 별을 바라보며 느꼈던 순수한 감정처럼, 이 도시의 밤하늘은 소리없이 나그네의 마음을 적셨다.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

코발트빛 밤하늘
별들이 보석처럼 흩뿌려진 캔버스
고독한 화가의 시선
어둠 속 반짝이는 한 줄기 빛
세상의 시름 잠시 잊게 하는 순간

카페 테라스
삶이 이야기로 풀어지는 작은 섬
테이블마다 놓인 고독한 그림자들
밤의 침묵 속으로 스며들 때

아를의 밤 풍경
색채로 비명을 지르듯
이 밤을 채색했지
빛은 어둠 속에 존재하고
예술은 그 빛을 갈망했지

별빛 아래 고흐
독한 압생트 한 잔에 취해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겼지

아를 시내 론강이 흐른다
원형경기장 주변 고흐추모비
아를의 아레나(원형경기장)
론강의 밤풍경
빈센트 반 고흐 <론강의 별이 빛나는 > 1888 75*92Cm 파리 오르세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1888 73*92Cm 런던 내셔널갤러리
빈센트 반 고흐 <밤의 카페 테라스> 1888 80.7*65.3Cm 네덜란드 크뢸러 뮐러미술관
반 고흐 카페, 그림 같은 정취는 느낄 수 없다.
빈센트 반 고흐 <아를의 여인> 1888 72 × 90 cm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 <노란 집> 1888 72 × 91.5 cm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
고흐가 귀를 자르고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던 아를시립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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