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서스의 추억
바쿠, 카스피해의 선물
카타르 도하도 뜨거웠지만 바쿠의 열기도 그에 못지 않았다. ‘불의 나라’답게 사막의 바람이 먼저 뜨거운 인사를 건네왔다. 불을 신봉하는 조로아스터교가 이 나라에서 발생한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바쿠는 카스피해 연안에 자리해 불의 땅을 물로 다스리고 있었다. 카스피해는 바쿠를 충분히 적셔주고 게다가 석유까지 생산하고 있었다. 석유 덕분에 바쿠는 중앙아시아의 중심도시로 발전하는 활기참이 보였다. 바쿠는 카스피해의 선물이었다. 사막 위의 도시지만 호수가 있어 삭막한 느낌은 없다. 호숫가의 이슬람 연인들의 애정 표현도 자유롭다.
언덕 위에 특별한 모양의 건축물이 눈에 들어왔다. 바쿠의 랜드마크 불꽃성(Flame Towers)이다. 아제르바이잔이 '불의 땅'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불꽃을 형상화한 외관이다. 현대적이고 독특한 디자인으로 바쿠의 스카이라인을 멋지게 살리고 있다. 바쿠만의 독특한 건축문화를 보고, 이 나라 출신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를 상기했다. 그녀는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 건축가이다. 우리나라의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를 설계한 건축가도 바로 자하 하디드였다.
셰키, 실크로드의 고즈넉한 보석
선사유적지 고부스탄에서 4시간을 달려 실크로드의 길목 셰키에 도착했다. 바쿠의 번잡함과는 달리 조용하고, 고부스탄의 사막과는 달리 생명들이 초록초록하다. 푸른 산자락에 안긴 고즈넉한 풍경이 사막을 달려온 나그네를 편안하게 감쌌다. 이슬람 종탑을 중심으로 퍼져 있는 야트막한 마을은 한가하고 평화롭다. 숙소 바로 건너편에는 셰키의 유적지, 칸의 궁전과 고대 무역상들의 쉼터였던 카라반 사라이가 우뚝하다.
나는 세키가 그 옛날 실크로드의 길목이었다는 사실에 관심이 갔다. 셰키의 카라반 사라이가 그 증거물이었다. 셰키는 지금보다 그 때가 더 번영했던 시절이었겠다. 카라반 사라이의 거대한 돌벽은 아라비아 상인들의 땀과 사막의 먼지,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들을 머금은 듯 육중했다. 높은 아치형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이층 건물이 둘러싼 넓은 안뜰이 나왔다.
아래층은 낙타들이 머물고, 윗층은 상인들의 숙소였단다. 예전에 낙타들이 짐을 풀고 쉬던 자리에는 작은 기념품 가게들이 옹기종기 들어앉았고, 가게 안에는 아라비안 카펫과 수공예품, 그리고 이 지역 특산물인 견과류 등이 가득했는데, 상인들의 손때 묻은 물건들 하나하나에서 이곳의 생활이 만져지는 듯했다. 은으로 만든 장신구의 섬세하고 은은한 빛깔이 인상적이고 달콤한 향신료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회랑을 따라 올라갔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 안쪽에는 예전 상인들이 머물던 방들이다. 창문 너머로는 푸른 하늘과 셰키의 고즈넉한 마을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벽돌과 나무로 지어진 소박한 방들은 당시의 상인들의 고단한 여정과 편안한 휴식을 상상하게 했다. 수백 년 전 낙타 행렬의 묵직한 발자국 소리, 상인들의 흥정 소리, 그리고 여행자들의 노랫소리를 그려보았다. 카라반 사라이는 숙소의 기능 뿐만 아니라, 문물이 오고가면서 동서양을 잇는 문화 교류의 장이기도 했다. 이 오래된 공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실크로드의 찬란했던 역사를 조용히 증언하고 있었다.
저녁식사 장소는 그 옛날 칸이 만찬을 즐겼을 법한 궁전 같은 식당이었다. 아라베스크 특유의 문양과 섬세한 조각과 색감이 예사롭지 않았다. 저녁 메뉴로 식탁에 올라온 현지식 사즈는 푸짐했다. 사즈는 둥글고 넓적한 철판의 이름에서 유래된 음식으로 우리의 닭갈비 요리와 비슷했다. 여기에 전통 빵을 찢어 사즈에 나온 고기나 채소를 싸 먹거나, 소스처럼 찍어 먹기도했다. 식사 중에는 이벤트도 벌어졌다. 먼저 남성 연주자가 감미로운 만돌린 연주를 하고, 만돌린 연주에 이어서 체구가 작은 여가수가 나와 아리랑 노래를 부른다. 중간중간 불완전한 발음도 있었지만 얼마나 연습했는지 노래하는 정성이 가상하다. 먼 이국 땅에서 아리랑을 듣다니 가슴이 뭉클했다. 일행 중 몇몇은 손뼉치며 아리랑을 합창하더니 흥이 고조되자 무대로 나가 덩실덩실 춤까지 춘다. 세키의 밤은 멋진 식당에서 푸짐한 현지식에 아리랑 공연까지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했다.
오늘 호텔 방은 전망 좋은 스위트룸으로 배정받았다. 방이 두 칸에다 응접실이 따로 있고 월풀욕조까지 구비되어 있는 그런 객실이었다. 방을 배정할 때 마땅한 2인실 방이 없어서 그랬는지, 내 생일을 알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가이드는 와인을 한 병 보내왔다. 마침 오늘이 내 생일이다. 뜻밖에 생일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가이드의 배려에 감사하고, 셰키에서의 조촐한 생일 파티로 아내와 와인잔을 부딪쳤다.
우리! 지금! 여기에! 건배!
행복은 저축할 수 없지......
이 정도면 여행의 만족도는 최고가 아닐까? 하룻밤만 묵어가기엔 정말 아쉬운 그런 셰키의 밤이었다. 셰키는 자연과 역사, 그리고 소박한 사람들의 삶이 어우러져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슬로시티 같았다. 조지아로 넘어가기 전,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새로운 여정을 준비하기에 적절한 곳이었다.
셰키에서의 새벽은 한국의 시골처럼 닭 울음소리가 아닌 이슬람 기도 소리로 시작됐다. 미나레트(종탑)에서 울려 퍼지는 아잔 소리는 고요한 마을을 깨우며 하루의 시작을 알렸고, 그 소리를 들으며 나도 일어났다. 이른 아침, 숙소에서 멀지 않은 칸의 궁전을 찾아 나섰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 높다란 담장에 갇힌 궁전은 아침 안개 속에 잠겨 더욱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보수 작업 중이라 문이 닫혔지만 쪽문으로 들어가 둘러보고 나왔다. 칸의 여름철 별장으로 사용했다고 적혀있다.
여름 궁전 답사를 마치고 다시 카라반 사라이로 향했다. 수백 년 전 실크로드를 오가던 상인들도 아마 이런 새벽을 맞았으리라. 먼 길을 떠나기 전, 혹은 긴 여정 끝에 잠시 숨을 고르며 새로운 하루를 준비했을 그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시끄러운 상인들의 흥정 소리 대신, 새들의 지저귐과 풀벌레 소리만이 가득한 아침은 셰키가 지닌 고요한 매력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셰키에서의 상쾌한 아침을 보내고, 조지아를 향해 떠났다. 국경을 넘기 전, 마지막으로 셰키의 정취에 젖고 싶어 눈을 감았다. 차 안에서는 아제르바이잔 출신 세계적인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 선율이 흘러나왔다. 그의 깊고 풍부한 음색은 푸른 산맥을 오르는 구불길 위에서 더욱 감성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 B단조의 웅장하면서도 서정적인 멜로디가 그랬다. 그가 소련의 억압 속에서도 자유를 갈망하며 음악으로 저항했던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는 조국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지만 음악으로 전 세계와 소통했다. 지금 국경을 넘어 새로운 땅으로 향하는 이 여정에서 망명 음악가의 심금을 울리는 연주는 내게 깊은 울림을 더해 주었다. 나는 그를 천재 소녀 장한나의 스승으로만 기억했다. 그는 어린 장한나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녀를 직접 가르치며 세계적인 첼리스트로 성장시킨 위대한 스승이 아니었던가. 로스트로포비치, 그의 조국에서 그의 연주를 들으며 음악가의 뜨거운 애국심을 되새겨 보았다. 그의 음악처럼, 나 또한 이 여행을 통해 새로운 자유와 영감을 찾아가는 중이다.
산비탈을 얼마나 달렸을까, 도로 위를 가득 메운 양떼를 만났다. 목동은 지팡이를 짚고 그 뒤를 따를 뿐 피할 생각이 없다. 목동의 시계는 우리의 그것과 달랐다. 한동안 차를 멈추고 이 평화로운 풍경을 감상했다. 대자연 속에서 벌어지는 또다른 삶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국경 검문소는 생각보다 한산했다. 그런데 입국수속이 마냥 늦어진다. 답답하고 약간의 짜증이 올라온다. 그러다가 문화적 우월감에서 오는 불쾌감인 듯 싶어 그들만의 문화를 그냥 즐기기로 했다. 여권 심사를 마치고 조지아 땅을 밟는 순간, 왠지 모를 설렘과 기대감이 밀려왔다. 창 밖 풍경은 서서히 변해갔다. 건조한 아제르바이잔의 황량함 대신, 푸른 포도밭과 울창한 숲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불의 나라에서 물의 나라로 이동한 것이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 선율이 끝나고 이제는 조지아의 가요 ‘백만 송이 장미’ 가 들리는 시그나기가 국경에서 멀리 않다.
시그나기, 백만 송이 장미 피어나는 사랑의 도시
시그나기는 조지아의 작은 도시인데, 이름이 참 독특하다. '피난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전쟁이 많았을 때, 조지아 왕이 이곳에 성을 쌓고 백성들을 이주하게 했다는 데서 유래했단다. 굽이진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시그나기는 아름다운 성곽을 숲으로 둘러쌌다. 시그나기는 높은 종탑과 붉은 지붕이 예쁜 건물들이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어서 동화 같은 풍경이다. 성곽을 따라 걸으면 눈앞에 펼쳐진 파노라마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코카서스산맥의 웅장한 연봉들이 흰구름을 머리에 이고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그 아래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카헤티 평원의 포도밭이 따가운 햇살 아래 반짝인다. 왜 이곳을 '사랑의 도시'라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이 멋진 인생 풍경과 ‘백만송이 장미’ 사연에 나도 모르게 마음을 빼앗겼다.
시그나기는 러시아 가요 '백만 송이 장미'의 배경이 된 도시다. 가난한 화가가 사랑하는 프랑스 여배우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백만 송이 장미를 선물했다는 그 애절한 이야기는, 이 작은 도시에 사랑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시그나기 출신 화가 니코는 누구보다 재능은 뛰어났지만, 세상은 그의 그림을 알아주지 않았고, 그는 늘 궁핍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의 아름다운 여배우 마르가리타가 셰키를 거쳐 이 시그나기 마을에 공연을 왔다. 그녀의 우아한 자태와 매혹적인 눈빛에 니코는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녀에게 구애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화가는 자신의 그림을 팔아 돈을 마련하고, 그것도 모자라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팔아치웠다. 오로지 마르가리타를 위한 단 하나의 선물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아침, 마르가리타가 머물던 호텔 앞 거리는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니코는 자신의 모든 돈을 털어 사 온 백만 송이의 붉은 장미를 마당과 길거리를 가득 채우고 영화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마르가리타는 창밖을 내다보다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많은 군중 속에서, 그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떨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니코를 발견했다. 꽃잎 속을 걸어 내려온 그녀는 니코에게 다가가 짧은 키스를 해주었다. 니코의 삶에서 가장 행복하고 찬란했던 단 한 번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만남은 그것이 전부였다. 이후, 그의 사랑과 백만 송이 장미의 전설은 시그나기에 새겨져, 이 도시를 영원한 사랑의 도시로 기억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수 심수봉이 이 노래를 번안해서 히트한 노래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슬픔이 가슴 저리도록 아련한 노래였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비록 이야기 속 화가처럼 거창한 선물이 아니더라도 나는 시그나기를 찾은 것만으로도 사랑하는 이에게 내 정성을 바치고 싶은 그런 마음이 일어났다. 한적한 시그나기 장터는 우리의 오일장처럼 소박하고 정겨운 모습이다. 숲 속 그늘진 곳에 전을 펴고 마을 사람들이 직접 키운 채소와 과일을 판다. 시그나기 풍경을 담은 기념품들이 아기자기하다. 갓 구운 조지아의 빵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시장을 지나 종탑이 보이는 찻집을 찾아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고장난 벽시계 같은 여유가 찾아왔다. 오롯이 나 자신과 마주하며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찾아가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시그나기는 내게 잊고 살았던 낭만을 알려 주었다. 내 삶의 속도를 늦춰주었다. 만일 또 하나의 삶이 주어진다면, 바로 이곳, 영원히 머물고 싶은 사랑의 도시, 시그나기에서 시작해야겠다는 강렬한 끌림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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