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기행

詩香이 흐르는 장수대

경산 耕山 2025. 6. 29. 15:31

詩香이 흐르는 장수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문장가였던 상촌 신흠(象村 申欽 15661628)은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세 가지 즐거움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을 닫고 마음에 드는 책을 읽는 것
(閉門閱會心書 폐문열회심서)
문을 열고 마음에 맞는 손님을 맞이하는 것(開門迎會心客 개문영회심객)
문을 나서 마음에 끌리는 경치를 찾아가는 것(出門尋會心境 출문심회심경)

독서의 즐거움, 친교의 즐거움, 여행의 즐거움을 참된 즐거움으로 삼았다. 나는 상촌의 인생삼락에 공감하며 상촌처럼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그 중에서 여행의 즐거움으로 문을 나서 마음에 끌리는 '나의 여행 일번지는 어디일까' 생각해보았다. 여러 군데 유혹하는 행선지가 있지만 나는 설악산을 먼저 찾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남설악에 위치한 장수대를 꼽겠다.
한계령 아래 위치한 장수대는 설악산의 깊은 품으로 들어가는 첫걸음이자, 대승폭포와 대승령, 십이선녀탕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의 시작점이다. 인제와 양양을 잇는 44번 국도변으로, 원통과 한계령휴게소 중간지점이다. 장수대는 대중교통도 접근성이 좋고, 상대적으로 한적한 분위기 덕분에 조용한 산행을 원하는 이들에게 사랑받는 트레킹코스다. 대승폭포는 금강산의 구룡폭포, 개성의 박연폭포와 함께 한국의 3대 폭포로 꼽힌다. 장수대에서 대승폭포까지는 약 900m. 짧지만 가파른 계단길이 이어진다. 오르는 내내 동쪽으로 펼쳐지는 한계령 능선과 남쪽의 가리봉이 선사하는 눈맛은 시원하다. 대승폭포까지 오르는 사이사이에는 대승폭포를 노래한 옛 시인묵객들의 12 시비가 반겨준다. 대승폭포 12시비(詩碑)는 옛 선비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시간의 서사이기도 하다. 길손의 마음을 멈추게 하고, 자연과 시가 만나는 지점을 일깨워주는 감성의 이정표라고 할까? 폭포를 향해 오르는 발걸음마다 시 한 수가 동행하니, 이 길은 등산로라기보다는 시와 풍류가 흐르는 문학의 오솔길이라고 불러야 맞다. 바람이 시비를 스치고, 나뭇잎이 그 위에 내려앉을 때, 이 길은 오래전부터 누군가의 감탄과 사색으로 이미 걸었던 길임을 알게 된다. 조선시대 진경산수시가 무엇인지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명소가 바로 장수대라고 말하고 싶다. 대승폭포는 시를 쓰는 자리였고, 나는 잠시 그 시를 읊조리는 독자가 되었다.

좋구나! 설악산 기이한 절경이여,
대승폭포가 여산폭포보다 낫구나”/금원 김씨

“아슬하여라,  한계폭포여!
만 길 절벽에서 떨어지다니
” / 삼연 김창흡

폭포는 말이 없으나 그 소리는 천둥 같고
물방울 하나에도 우주의 이치가 담겼도다” / 농암 김창협

“끊임없는 물의 기세 온전한 여름 들려주고
서늘한 정신은 늦가을을 보여준다
” / 운석 조인영

"은빛 폭포 찾아 험한 산 오르니
가파른 비탈길, 하늘과 그리 멀지 않네" / 서파 오도일

시를 음미하며 걷다보면 계단이 끝날 즈음, 숲 사이로 들려오는 물소리가 점점 커진다. 이어서 폭포 안내표지가 나오고 마침내 88m 높이에서 쏟아지는 대승폭포가 장엄한 모습을 드러낸다. 폭포는 절벽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폭포는 절벽을 만나야만, 비로소 노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폭포는 흐르면서도 멈추지 않고, 부서지면서도 흩어지지 않는다. 물안개가 햇살에 반사되어 무지개를 만들고, 그 장관 앞에서 누구나 눈 코 입을 크게 벌릴 수밖에 없다. 그 물소리는 세상의 언어를 잠재우고, 떨어지는 물줄기 아래선 오직 자연만이 말을 걸어온다. 이곳에서 시는 종이에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다. 물소리, 바람, 나무 그림자 모두가 한 편의 시가 되어 흐르고 있다. 햇살에 반짝이는 물방울은 마치 선비의 붓끝에서 튀어나온 詩句와 같다. 그 물기 어린 공기 속엔 오래전 선비들이 읊조린 시향 (詩香) 이 배어 있고, 바위에 부딪치는 물줄기는 숲속의 음악처럼 부드럽고도 준엄했다.
조선시대 문인 곡운 김수증은 이곳에 구천은하(九天銀河)”라 새겼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은하수 같다는 이백의 여산폭포의 한 구절이다. 장수대에서 대승폭포에 이르는 길은 시향이 흐르는 길이다. 이 길은 평범한 등산로가 아니라 풍류의 길이다. 선비들은 거문고를 둘러메고, 시를 읊으며 이 길을 올랐으리라. 술 한 병과 붓 한 자루면 충분했던 그들의 유람은, 자연과 하나 되는 유유자적한 삶의 미학이었다.

지난 해, 나는 철 따라 장수대를 찾았다. 대승폭포 12 시비가 나를 때 맞추어 불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저 12 시비의 시인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답사 때마다 폭포는 한결같지 않았다. 철마다 쏟아내는 물줄기의 차이가 크고, 폭포 주변 풍광에 따라 느끼는 감흥도 달랐다. 가뭄이 드는 오월에는 물이 없는 절벽만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다양한 표정이 대승폭포의 매력일지도 모른다. 詩香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마음 속의 번잡함이 씻겨 내려가고, 어느새 나도 선비가 되어 시 한 수 읊고 싶다.

대승의 사계

대승폭포 아래
하얗게 피어난 꽃잎들
물안개에 젖어 속삭인다.
겨울을 밀어내는 물소리
어느새 내 마음 속
문을 열어젖힌다.

하늘이 갑자기
자신을 쏟아낸 듯
폭포는 격렬하게 울고 있다.
빛과 물이 부딪히는 그 순간
나는 살아 있다는 것이
전율처럼 느껴졌다.

단풍보다 붉은 침묵이
절벽에 매달려 있다.
폭포는 흐르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얼음이 된 물줄기
세상의 시간도 함께
멈춘 듯하다.
그 차가운 침묵 속에서
나는 오히려
마음을 데운다.

대승폭포 입구 장수대
대승폭포 오르는 길 주변 풍광이 장관이다.
전망대에 서면 멀리 가리봉이 시원하다!
곡운 김수증이 새긴 구천은하 ( 九天銀河 )
대승폭포의 봄, 가뭄으로 물줄기가 말랐다.
여름의 대승 폭포, 물 흐름이 장쾌하다!
가을 대승폭포, 물줄기가 붉은 시를 쓰는 붓끝 같다!
겨울 대승폭포, 침묵 속에서 가장 큰 소리를 내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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