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 시간의 풍경 속을 걷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고, 모든 여행은 로마에서 시작된다는 말을 실감하는 여정이었다. 괴테가 “로마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을 발견했다”고 고백했듯이 5월의 햇살 아래 로마는 나를 압도하며 동시에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판테온의 경이로운 돔 아래에서는 신과 인간의 경계에 선 듯 경건해졌고, 콜로세움의 거대한 아치 앞에서는 검투사의 외침과 관중의 열광이 시공을 초월해 들려오는 듯했다. 2000년의 세월을 견딘 ‘돌의 미학’, 그 장엄함은 인간의 유한함을 위로하는 영원의 언어 그 자체였다.
화려한 역사의 이면에는 아물지 못한 상처도 있었다. 교황은 고대 유적에서 돌기둥을 뽑아 베드로 대성당을 짓고, 귀족들은 콜로세움의 장식을 떼어내 제 집을 꾸몄다는 이야기 속에서 역사의 탐욕과 명암을 보았다. 영원할 것 같던 로마의 영광도 결국 인간의 손으로 빚고 인간의 욕망으로 훼손되는 필멸의 운명을 지녔음을, 도시의 그림자는 말하고 있었다.
로마의 여운을 뒤로하고 이탈리아의 속살, 토스카나와 움브리아 지방의 소도시로 향했다. 복잡한 로마보다도 한적한 소도시를 걷고 싶었다. 이탈리아의 또다른 모습을 소도시 성곽에서 찾아보고 싶었다. 중세 봉건시대의 성곽도시들은 이탈리아의 민속촌인 셈이다.
‘이탈리아의 그랜드캐니언’이라 부르고 싶은 치비타에 도착했다. 치비타는 협곡에 위태롭게 자리한 중세마을이었다. 투파라 불리는 연약한 화산재 암반 위에 세워져 “죽어가는 도시”라는 슬픈 별명을 가졌지만 아름답고 유서 깊은 절벽 위의 마을이다. 가느다란 다리 하나만이 세상과 연결된 그곳은 금방이라도 바스라져 사라질 듯 애처로웠다. 절벽 위의 삶은 고단해 보였다. 매일같이 절벽이 무너져 내리는 터전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장엄한 비애 그 자체였다.
찰스 디킨스는 이탈리아의 언덕 위 도시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 도시들은 산의 가파른 비탈 위에 고요하게 놓여 있으며, 종탑과 돔은 저녁 햇살에 빛난다. 마치 꿈속의 성채들처럼, 시간이 멈춘 듯 보인다."
오르비에토 역시 절벽 위에 세워진 드라마틱한 천혜의 요새였다. 외부 침략으로부터 역사와 유적을 지켜온 성곽도시다. 아름다워서 위험한 마을이었으리라. 1999년 슬로시티 운동의 발상지답게 주민들은 전통을 중시하되 건강한 음식과 느린 삶의 방식으로 살면서 행복을 추구한다. 고풍스러운 중세 골목을 천천히 걸으며 마을 곳곳의 독특한 건축물과 중세의 분위기를 상상해 보았다. 슬로시티 모퉁이에 앉아 마신 오르비에토 클라시코 와인 한 잔. 그 서늘하고 향긋한 액체는 잠시나마 여행자의 고단함과 삶의 위태로움을 잊게 하는 달콤한 휴식이었다.
토스카나 평원 높다란 언덕에 자리한 피엔차는 마치 르네상스의 이상이 현실로 구현된 풍경 같았다. 피엔차의 조화롭고 정제된 건축은 작은 도시임에도 놀라운 균형미를 보여주었고, 좁디좁은 골목 사이로 흘러드는 햇살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을 안겨주었다. 성곽에서 내려다본 발도르차의 풍경, 사이프러스 나무와 밀밭, 점점이 박힌 농가들이 자연과 인간이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흔적처럼 느껴졌다. 그곳의 공기는 조용했지만 깊었고, 그 침묵 속에 수많은 이야기들이 잠들어 있는 듯했다.
아침비가 개인 후, 물기를 머금은 발도르차의 밀밭은 한층 더 깊고 선명한 초록빛으로 반짝였고, 대지가 내쉬는 깊은 숨결처럼 부드러운 능선은 끝없이 펼쳐졌다. 토스카나주의 평원의 싱싱한 초목들, 가뭄을 모르는 듯 젖과 꿀이 흐르는 이탈리아의 풍요를 보았다. 밀밭에 들어서서 바람에 일렁이는 밀밭의 거대한 물결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흙과 풀의 싱그러운 향기가 훅 밀려 들어왔고, 그 평원 사이를 가로지르는 구불구불한 길에서 나는 무엇에 홀린 듯 그 길을 달렸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신발에 닿는 부드러운 흙의 감촉과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것은 여느 풍경이 아니라,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어루만지는 부드럽고도 위대한 자연의 위로였다.
발도르차 평원은 한 마디로 그림이었다. 르네상스의 화가들이 신의 정원을 그린다면 바로 이곳을 그렸으리라. 부드러운 능선은 대지의 숨결처럼 파도치고, 5월의 햇살에 푸른 밀밭은 부드러운 빛을 발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초록의 바다는 일렁였고, 언덕 위에 홀로 선 돌집과 그 곁을 지키는 사이프러스 나무들은 이 거대한 캔버스에 찍어놓은 고독하고도 완벽한 음표였다. 모든 언덕과 계곡이 살아있는 악보가 되어 장엄한 교향곡을 연주했다. 이 완벽한 조화 속에서 나는 현실의 모든 무게를 잊었다. 이곳은 지상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유토피아였다. 영화 글래디에이터(Gladiator)에서 주인공 막시무스가 꿈길을 걷는 장면의 배경이 바로 이곳이다.
잘 그린 풍경화 한 점
아니 색깔만이 아니라
멜로디가 흐른다
푸른 밀밭은 거대한 캔버스
사이프러스는 작은 음표
높고 낮은 굴곡은 그대로 악보다
그림 속에 음악이 있고
음악 속에 그림이 있고
그 가운데 내가 서 있다
여기는
신들의 세상 파라다이스
영원한 나의 유토피아
발도르차의 드넓은 평원을 지나 시에나에 이르는 길에는 비가 내렸다. 이탈리아는 빗소리마저도 명품이란다. 빗소리가 '구치구치'로 들린다는 우스겟소리도 있다. 어둡고 좁은 골목을 따라 오르다 보면 중세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캄포 광장에 도착한다. 그 중심에는 웅장한 시에나 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성은 피렌체와의 오랜 대립 속에서 시에나의 독립과 자부심을 상징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피렌체가 르네상스의 꽃을 피우며 예술과 과학의 발전에 집중했다면, 토스카나의 농업 중심지, 시에나는 전통과 공동체를 중시하며 독특한 문화를 지켜왔다. 광장 내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 마시며 듣는 빗소리는 내게 13세기 시에나도 피해갈 수 없었던 공포의 흑사병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다.
치비타, 오르비에토, 피엔차, 시에나를 잇는 이탈리아 소도시의 성곽 트레킹은 돌과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중세와의 만남이었다. 옴브리아와 토스카나 지역의 중세 성곽의 모습은 대체로 비슷했다. 절벽 위, 육중한 성문을 통과하면 성곽에서 좁은 골목으로 좁은 골목에서 넓은 광장으로 이어지고 광장에는 시청사와 대성당이 우뚝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성벽 위의 좁은 보도(Rampart)에 서면, 한쪽으로는 광활한 평원이, 다른 한쪽으로는 미로처럼 얽힌 붉은 지붕의 도시가 펼쳐지며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이 성벽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시민을 지키는 물리적 경계이자, 야만과 무질서로부터 문명과 자유를 수호하겠다는 중세 도시공동체의 결연한 의지 그 자체였다. 성문을 지나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로 들어서는 순간, 길은 단지 통로가 아니라 이방인의 침입을 늦추고 이웃 간의 소통을 촉진하는 유기적인 장치였음을 온몸으로 깨닫게 된다. 외세의 위협 속에서 더 단단하게 뭉쳐야 했던 시민들의 공동체 의식, 신과 인간의 질서를 담아내려 했던 광장과 대성당의 상징성, 그리고 언덕 위에 인간의 힘으로 안전과 번영의 터전을 일궈낸 강인한 생명력이 발걸음마다 묵직하게 전해져 왔다.
로마가 제국의 서사를 웅변하는 거대한 무대라면, 구릉 위에 자리한 성곽도시들은 중세와 르네상스의 이상을 간직한 채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고요한 정원과 같았다. 로마에서는 콜로세움의 잔해부터 바로크 양식의 분수까지, 수천 년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복잡한 공간 속에서 역사의 장엄함과 무상함을 동시에 느꼈다. 반면, 성곽도시의 성벽 안에서는 잘 보존된 중세의 골목과 광장을 거닐며, 주변의 자연 풍광과 어우러진 한가로운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영원한 도시 로마가 문명의 집적이라면, 성곽도시들은 중세 시간의 정원이었다.
소도시 성곽 투어를 마치고, 피렌체 근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고향, 빈치 마을에 숙소를 정했다. 위대한 예술가의 고향에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영혼 없는 건축의 실체를 마주했다. 새벽녘, 4성급 호텔 방 천장을 뚫을 듯한 윗층의 화장실 소음과 머리 위로 쏟아지는 듯한 물 내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누구의 새벽 오줌소리에 단잠을 설친 아침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로마건축의 견고함에 감동했던 마음이, 현대 건축의 민낯 앞에서 허탈하게 무너져 내렸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예술가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고, ‘거꾸로 가는’ 이탈리아의 현실만이 슬프게 남아 있었다. 빈치 마을에 다빈치는 없었다.
꿈 같은 로마, 옴브리아, 토스카나 여정에서 아름다움과 쓸쓸함, 감동과 실망, 위대한 과거와 초라한 현재가 공존하는 이탈리아의 모습을 나는 보았다. 5월,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풍경과 시간의 흔적들은 내 삶의 모습을 비추는 거대한 거울이었고 소중한 추억이었다.
젊었을 땐 여유가 없고,
여유가 생기니 시간이 없고,
여유롭고 시간이 많아지니 다리가 아프다.
그게 바로 인생인 것을......
이탈리아의 여정을 돌아보며, 문득 인생의 여정을 떠올려보았다.



성곽에서 좁은 골목으로
좁은 골목에서 넓은 광장으로
중세 마을의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