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강의 추억
이집트! 나일강, 피라미드, 미이라, 오벨리스크, 람세스로 기억되는 나라
카이로의 소란을 뒤로하고 아스완으로 떠나는 ‘외국인 전용기차’는 폐차 직전의 삼등열차였다. ‘외국인 전용기차’는 낭만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낡고 지쳐 있었다. 기차의 몸체는 녹이 슬어 페인트로 쓴 글씨가 떨어져 나가고, 구멍이 뚫린 유리창은 투명테이프로 더덕더덕 붙여놓았다. 문명의 이기라기보다는 철로 위에 놓인 고대 유물 같았다. 나는 유물 같은 이 기차에 불편하게 몸을 싣고 나서야, 비로소 파라오의 시간을 만나러 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게다가 무장 군인의 경계는 이 기차가 얼마나 특별한지,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기차인지 넌지시 알려 주고도 남았다. 기차가 출발하면서 덜컹거리는 소리는 마치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다. 이층 침대에 누워 창 밖을 바라보니, 이집트의 밤하늘 아래 나일강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나일강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여행이 내 영혼을 풍요롭게 한다.’는 생각으로 나일의 아침이 내 앞에 펼쳐질 광경을 기대하며 잠이 들었다.
기차에서의 밤이 지나고, 이집트 문명의 발원지 아스완에 도착했다. 말로만 들어왔던 TV에서만 보았던 역사의 강, 인류문명의 발상지 나일강가에 섰다. 삼각돛배 펠루카가 나일강의 아침을 가르며 유유히 떠나간다. 갈대섬과 바위섬이 이어지는 강 위에서 왜가리와 가마우지 떼가 날개를 접으며 쉬고 있던 모습은 마치 자연이 인간에게 보내는 인사말 같았다. 강 건너편 모래 언덕에서 미끄럼 썰매를 즐기는 사람들, 낙타를 타고 줄지어 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기차의 먼지와 피로를 털어내고 여장을 푼 곳은 강물 위에 떠 있는 우아한 호텔, 나일강 크루즈였다. 낡은 기차의 객실과 달리,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흐르는 깨끗한 선실과 깨끗한 갑판, 반짝이는 강물은 다른 세상처럼 안락했다. 선실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숨을 돌렸다. 강물은 이제껏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요하고 너그러운 얼굴을 하고 흐른다. 며칠간 이어진 크루즈 여정은 그 자체로 흐르는 시간의 파노라마였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창밖으로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강가에서 물을 긷는 여인들, 당나귀를 타고 가는 농부, 무성한 대추야자 숲이 그림처럼 스쳐 지나간다.
배에서 내려 작은 유람선에 올랐다. 어디선가 나타난 작은 조각배가 맹렬한 속도로 우리 배를 따라붙었다. 때 묻은 옷을 입은 소년들이 유람선 난간을 잡고 작은 손들을 뻗으며 외쳤다. "원 달러! 미스터, 원 달러!" 이국적인 풍경에 취해 있던 이방인의 감상은 그들의 절박한 눈빛 앞에서 단숨에 깨져 버렸다. ‘지금은 학교에서 공부할 시간인데’라는 걱정은 우리 나라의 루틴일 뿐이다. 소년들에게는 나일강이 학교였다. 나일강이 그들을 가르치고 먹이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나일강의 맨 얼굴과 마주했다. 나일강은 유산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는 걸 경험했다.
유람선은 누비안 마을로 향했다. 코발트블루, 노란색으로 칠해진 원색의 지붕 위로 저녁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누비안은 고향을 빼앗긴 사람들이 사는 슬픈 마을이었다. 아스완댐 건설로 고향을 잃은 수몰민들이 이주한 마을이라는 사실을 애써 잊으려 할 때쯤, 어디선가 요란한 결혼식 풍악 소리가 강물 위로 들려온다. 북소리와 여인들의 환호성이 뒤섞여, 고단한 삶의 터전 위에서도 끈질기게 피어나는 생명의 환희를 보여주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보름달이 높이 떠 있고, 잔물결 위로 일렁이는 달빛 아래 강물은 소리없이 흐른다. ‘나일강은 다르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누비아와 함께 흐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침묵으로 당부를 하는 것일까? 이 강은 하루하루 소리를 삼키고, 역사를 안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인가?
크루즈는 강을 따라 악어 신과 매의 신을 함께 모시는 콤옴보 신전 앞에 닿았다. 이 거대한 배가 시간의 강을 따라 고대문명의 심장부로 실어 나르는 타임머신처럼 느껴졌다. 신전들은 시간의 이정표였다. 강가에 우뚝 선 신전은 달빛 아래 신비로운 위용을 뿜어냈다.코옴보와 에드푸 신전을 차례로 들렀다. 그 웅장한 기둥, 정교한 벽화, 사라진 색감까지도 이집트의 한 조각이었다. 신전 입구에서부터 이집트 특유의 상형문자가 빼곡히 새겨져 있다. 돌기둥 사이를 천천히 거닐며 신이 사라진 신전의 숨결을 만져보았다. "바람은 사라지지만, 돌기둥은 기억한다."는 어느 여행자 낙서도 보았다.
크루즈의 종착지인 룩소르에 닻을 내렸을 때, 죽은 자들의 도시, 살아있는 신의 흔적, 인류가 만든 가장 위대한 건축물들을 마주할 준비가 필요했다. 룩소르는 ‘살아 있는 박물관’이란 별명이 붙은 도시로, 고대 이집트의 수도 테베가 있던 자리다. 여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그 순간의 환상적인 연주라는 생각을 했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 단정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해마다 반복되는 강의 범람이 가져다준 풍요는 파라오가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신전을 짓는 기반이 되었다. 그 정점에는 ‘이집트의 진시황’으로 비유되는 건축왕 람세스 2세가 있었다. 나일강은 이집트 문명의 근원이자 수천 년의 역사를 품은 세월의 물줄기다. 지금도 여전히 푸른 생명을 주는 어머니가 나일강이다. 강을 따라 더듬어 가며 마주한 룩소르와 아스완의 유적들, 사이사이 고대의 조각들이 던지는 역사의 고백을 들었다. 침묵에도 언어는 있었다.
카르나크 신전의 거대한 돌기둥 숲 사이를 걸을 때, 거인국에 들어선 소인처럼 무력해졌다. 그 거대함 앞에 절망에 가까운 경외심을 느꼈다. 3천 년이 지난 지금, 람세스 2세의 위업은 그의 후손들을 먹여 살리는 가장 확실한 생계 수단이 되어 있었다. 조상들의 엄청난 희생이 후손들에게 복을 안겨준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란 이런 것인가. 람세스의 석상 앞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을 보며 위대한 파라오는 죽어서도 자신의 백성들을 부양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중국의 만리장성에 올랐을 때도 과거의 절망이 현재의 희망이 되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말없이 지켜보았었지. 모든 것은 변화하고, 변화의 흐름 속에 역사의 아이러니와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나일강의 마지막 밤, 나는 크루즈 갑판에 홀로 나와 룩소르 신전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조명 속에 빛나는 람세스 석상과 우뚝한 오벨리스크 속에서 문득 이집트의 또 다른 상처, 네페르티티 왕비의 흉상을 떠올렸다. 한 푼을 더하거나 반 푼을 덜어내면 그 완벽함이 무너진다는 절대미의 소유자. 도굴꾼의 거친 손길에 왼쪽 눈마저 잃어버린 채, 그녀는 이제 고향이 아닌 베를린의 박물관에서 ‘베를린의 모나리자’로 불리고 있다. 그 텅 빈 왼쪽 눈은 이집트가 잃어버린 유산의 슬픔을, 제국주의가 남긴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고발하는 듯했다. 안락한 크루즈 위에서 그 빼앗긴 비극적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며 깊은 탄식에 잠겼다.
크루즈에서 나와 룩소르의 진짜 밤거리로 들어섰다. 마차 투어를 했다. 남루한 옷차림의 마부와 엉덩이뼈가 앙상한 나귀가 끄는 마차에 올라탔다. 나귀의 배설물 냄새와 도시의 먼지, 마부의 담배와 매연이 뒤섞인 공기 속에서 마차는 달렸다. 안락했던 크루즈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현실이었다. 휘황찬란하게 불을 밝힌 룩소르 신전 앞을 지날 때와 희미한 전구 하나에 의지한 어두운 뒷골목을 지날 때, 나귀의 발굽 소리는 유난히 다르게 들렸다. 투어가 끝나고 마부에게 몇 푼의 팁을 건넸을 때, 그는 지친 미소를 잠깐 보였다. 돌이켜보니 그의 미소가 수천 년의 유적보다 더 기억에 남는다. 가난과 위엄이 한 도시에서 공존하는 그 풍경이 너무도 이질적이고 또 아름다웠다.
둥근 달 아래 도도한 강의 흐름을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지나온 여정은 공간의 이동이자 그 속에서 느낀 시간의 여행이었다.’ 나일강의 추억은 크루즈 갑판 위에서 본 낭만적인 풍경만으로 완성되지 않았다. 그것은 파라오의 영광과 마부의 고단함이, 펠루카의 평화와 구걸하던 아이의 눈빛이, 안락한 선실과 앙상한 나귀의 등이 함께 흐르는 강이었다. 이제 나일강은 내 삶에 깊이 새겨진, 무겁지만 더없이 소중한 기념품이 되었다. 모든 여행은 결국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아울러 이 모든 순간들에 감사하며 사랑을 느낀다.
나일강은 지금도 조용히 흐르고 있다.
그 물길 어디쯤엔 아직도 내 마음 한 조각이 흘러가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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