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기행

[답사기행] 임자도 기행

우록재 주인 2025. 4. 24. 21:52

임자도 기행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이화에 윌백하던 비선농원
4월의 꽃잔치도 끝났다.

해마다 피는 꽃은 비슷하건만(年年歲歲花相似)
해마다 사람 얼굴은 같지 않구나(歲歲年年人不同)

돋보기가 필요해 시력검사를 해보니 작년 같지가 않다. 가는 세월이 야속하기만한데 생활 주변에 대해 호기심도 간절함도 떨어지는 시력처럼 점점 희미해진
Life is not thing but doing! 삶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인생은 끊임없이 흘러야 한다. 가는 세월 막을 수 없지만  즐길 수는 있지.
나이로 살기보다는 생각으로 살자는 생각이 들 때 나는 답사여행을 떠난다
. 답사지를 찾아 시대를 앞서간 인물들의 삶을 돌아보면 내가 보인다. 특별하고 치열하게 살다간 고인들이 주는 메시지에는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튤립을 좋아하는 아내와 전라도 섬마을로 꽃바람 여행을 떠났다. 꽃집에서 파는 몇 송이 튤립보다 튤립축제를 통째로 안겨주고 싶었다. 검색을 해보니 임자도에서 튤립축제가 열리고 있다. 오늘이 축제 마지막 날이다.
보슬비와 안개비가 엷게 내리는 고속도로 주변 연두색 봄빛은 운무에 절반쯤 내준 채 상춘객을 맞고 있었다. 언제 보아도 남도의 봄은 정겹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가로수 벚꽃은 이미 다 졌지만 유채꽃이 바톤을 이어받아 푸른 잎새들과 더불어 남도길을 노랗게 장식하고 있었다. 바다와 어우러진 넓은 들녘에는 보리이삭이 패고 대파밭에서는 수확이 한창이다. 야트막한 논밭의 굴곡들은 눈맛 좋은 한 폭의 봄풍경화로 다가왔다. 섬마을 입구 임자대교의 하얀 교각 꼭대기가 자욱한 해무에 가려 멋스러움을 더한다. 3시간을 운전했지만 눈앞에 지나가는 봄풍경 파노라마가 너무 좋아 지루한 줄 몰랐다. 드라이브가 선사하는 봄의 운치를 제대로 감상을 한 셈이다.

임자도 튤립공원에 도착했다. 먼저 바다로 나갔다. 해무가 점령한 광활한 대광해수욕장은 이제 막 물이 빠지는 중이었다. 넓디넓은 해수욕장엔 사람들이 없다. 해변에서 자전거 타는 무리가 한 차례 지나갔을 뿐이다. 아내와 둘이서 밀려나는 썰물을 따라 한적한 대광해변을 한없이 걸었다. 사람 없는 망망한 해변을 여유롭게 거닐다 보면 잡스런 감정이 정화되고 시적 영감을 얻는 즐거움이 있다.
튤립축제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10,000원 내야 했다. 축제장은 예상보다 화려하고 축제의 본질을 충분히 살리고도 남았다. 튤립의 나라 네덜란드가 더이상 튤립의 고장이라고 자랑할 수 없을 것이라 평할 만큼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여러 겹의 원형트랙을 따라 배열된 튤립은 이름도 다양하고 색깔도 다채로왔다. 청초한 튤립이 발산하는 은은한 향기에 취해 튤립 트랙을 몇 바퀴 돌았다. 향기 치료가 되었는지 머리가 맑아진 느낌이다. 튤립공원 외에도 매화정원인 '백억원'(百億園)과 '향설원'(香雪園)을 조성하였고 동백나무 숲인 '송백원'(松栢園)으로 이어졌다. 동백나무는 오동도나 선운사에서 보았던 동백과 수종이 달랐다. 키가 크며 줄기 굵고 빨간 꽃송이가 모란처럼 큰 동백은 카네이션동백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동백은 한창 피고지고 있는 중이었지만 매화를 보려면 좀더 일찍 3월에 다녀왔어야 했다.

우봉조희룡미술관을 들렀다. 해수욕장 옆의 미술관이라니 조금은 낯선 조합이 아닌가. 임자도 사람들의 깊은 뜻을 헤아려 보며 입장했다. 그의 대표작 [매화서옥도]는 미술관의 얼굴로 가장 먼저 반겨주었다. 북송 시대 시인 임포(林逋)가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으로 삼고 숨어살았다는 고사를 그린 그림으로 우봉이 가장 사랑했던 매화를 그의 독특한 화법으로 그려낸 매화 그림 중 秀作이다. 매화가 만발해 눈인지 꽃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집 주위는 매화로 가득하다. 방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둥근 창에는 커튼이 쳐져 있고 책상에는 서책과 화병이 놓여 있다. 화병에 꽂힌 한 송이의 매화가 밝게 빛난다. 꽃병의 매화를 감상하는  매화주인이 보인다. 매화 향기와 눈 같은 꽃이 바다와 같다는 그림 속의 향설매(香雪梅) 광경이  바로 우봉이 꿈꾸는 이상향이자 자화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봉이 그린 매화에는 일생 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 정신을 느낄 수 없다. 그의 매화는 四君子에서 만나는 절제되고 지조 있는 매화가 아니라 아름다운 매화다. 우봉의 매화는 섬세하고 화려하다. 고고한 풍류와 그윽한 정취가 담겨 있고 은사(隱士)의 한가로움이 느껴진다.
우봉 조희룡은 매화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벽()이 있었다. 매화를 좋아하여 자신이 그린 매화 병풍을 두르고, 매화를 새긴 벼루와 먹을 사용했으며, 매화 시를 지어 큰 소리로 읊다가 목이 마르면 매화차를 마셨다. 또한 거처하는 집을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 이름하고,   '매화도인梅畵道人, 매수梅叟(매화를 좋아하는 늙은이), 단로丹老(붉은노인)'라는 호를 즐겨 사용했. 우봉은 평생 매화를 그리다 백발이 된 화가였다.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의 둥근 창 속에 그려진 선비의 모습은 우봉 자신으로 매화 취향을 숨김 없이 표현했다.

기름불 지글거리는 名利 속을 뚫고 나와
매화와 함께 지내노라니
철석 같은 마음이 모두 꽃 기운이라네

우봉조희룡미술관을 나와 그가 유배왔던 적거지를 찾았다. 적거지는 우봉 미술관에서 7.5Km거리에 있었다. 봄볕이 내리 쬐는 이흑암리 작은 마을엔 집집마다 깨끗한 벽면에 매화가 활짝 피어났다.  섬마을 벽에 피어난 매화는 조선 매화 그림의 일인자 우봉이 귀양살이하던 곳임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듯했다. 우봉이 살던 오두막집은 이름부터 풍류가 넘친다. ‘만 마리의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집’  <만구음관>은 스승로부터 배운  추사식 표현이다.(추사는 제주 유배에서 돌아와 '매화를 많이 많이 심어 봄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집'이란 의미로 <삼십만매수하실三十萬梅樹下室>이라고 당호를 지었다.)  만구음관의 뜻을 상상해 보면 당시에는 집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모양이다. 위치도 마을 뒤편 산기슭에 자리해 넓은 벌판 끝에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별장과도 같았다. 집 주변엔 매화나무 숲을 조성하고 그 사이에는 우봉의 그림 8 점을 철판에 에칭으로 복사해서 전시해놓았다. 지금은 매화철이 지나서 그런지  튤립에 밀려서 그런지 우봉의 매화를 찾아 적거지에 오는 사람이 없다.

임자도로 유배오기 전, 우봉은 헌종의 총애를 받았다.  금강산 실경을 그려오라는 명을 받아 다녀오고, 궁궐 누각에 문향실 聞香室이라는 편액을 썼으며, 매화 시를 지어 올리기도 했다. 또한 회갑을 맞이해서는 헌종으로부터 매화벼루와 책을 하사받기도 했다. 우봉의 총애는 헌종의 요절과 철종의 즉위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1851년 예송 논쟁에서 김정희와 권돈인이 탄핵되자, 스승 추사를 따르고 존경했다는 이유만으로 우봉은 임자도로 유배를 오게 된 것이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 유배지에서의 억울한 심사, 가족 소식을 기다리는 초조함과 벗들에 대한 그리움에 젖어 사는 우봉을 상상해 보았다.

햇살 따사롭고 산들바람 부는 옛 나루터
잔잔한 봄 물결 기름보다 푸르다
석양은 끝없어 지금이 좋으니
어찌 지나간 시절 근심으로 아파하리

우봉은 먼저 시를 써서 자신의 삶을 위로했다. 그는 봄바람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매화꽃잎을 붓끝으로 붙잡아놓았다. 무식한 섬마을 이웃들과도 친구로 허물없이 어울렸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매화 그림도 그려주고 배움을 청한 마을 청년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가르쳤다. 그리고 가장 힘든 곳인 유배지에서 매화 예술의 꽃을 피웠다. 어찌 보면 임자도에서 우봉의 삶은 모진 겨울 견뎌내고 꽃을 피우는 매화를 닮았다.
우봉은 무관 벼슬인 오위장을 지낸 중인계층의 예술가로 詩文書畫 모든 분야에 뛰어났다.
추사의 문인이었지만 추사에 구속되지 않았다. 추사는 우봉의 그림을 "문자향(文字香)이 없고 손재주만 뛰어나다"는 평을 했다.  우봉은 화가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화가의 손재주는 하늘로부터 받은 재능이다. 문장과 학문의 기운으로, 뛰어난 인품이나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또다른 경지로 보았다. 우봉과 추사는 신분 배경뿐 아니라 타고난 기질도 달랐다. 추사는 문자향 서권기를 중시했지만 우봉은 재능은 손 끝에서 나온다는 수예론(手藝論)을 강조하며 문인화에 대한 시각을 달리했다.  우봉은 신분이 아니라 타고난 재능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새롭고 독창적인 예술관으로 중인층의 문예계를 주도했던 그를 후세 인사들은 조선 문인화의 영수’, ‘먹을 다루는 세계의 우두머리라고 평가했다.

우봉의 적거지 마루에 앉아 다리쉼하면서 2% 부족한 적거지의 소회는 어쩔 수 없다. 만구음관이란 현판 외에는 우봉의 모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봉이 거처했던 집에 우봉의 흔적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우봉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림 그리는 모습이나 벽면에 매화 벽화 등 볼거리를 장식해 놓으면 찾는 사람들에게 이야기가 되고 배움이 되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축제기간에 우봉 그림을 테마로 한 매화 그리기 대회라도 있었으면 어떨까. 꽃을 사랑하는 마음과 매화에 담긴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기회가 될 터인데..... 먹고 마시고 사고파는 축제 이벤트에 우봉은 어디로 갔는가.
 큰 길 정자 옆에 세 개의 우봉 기념비가 각각의 멋을 내며 서 있었다. 2년 남짓, 봄날 매화 향기처럼 잠깐 머물다 떠났지만 우봉의 그 자리는 해마다 매화꽃이 피고 따뜻하다. 고을살이한 수령보다 귀양살이한 우봉이 이렇게 임자도에 깊은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해무 자욱한 임자도 대광해수욕장, 해변의 길이 12Km
매화서옥도, 18세기 족자 종이에 담채, 106.1X 45.6 cm, 간송미술관

오른쪽에는 그림과 어울리게 제발을 적었다.
"좀 먹은 벽장 속에서 묵은 그림을 얻었다. 바로 스무 해 전에 그린 '매화서옥도'였다. 그저 장난스러운 손놀림이나 기이함이 있고 연기에 그을려 거의 백년은 된 것 같으니. 매화 그림이 이런데 하물며 사람이랴! 펴보고 나니 죽었던 친구를 다시 보는 느낌이구나!"

홍매 대련, 19세기 중엽, 종이에 담채, 각 폭 127.5x30.2cm, 이건희컬렉션

"줄기 하나를 치더라도 용을 움켜잡고 범을 잡아매듯이 해야 하며 꽃 한 송이를 그려 넣더라도 구천에서 현녀(玄女)가 노닐 듯해야 하며 한 줌의 벼룻물을 곧 푸른 바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봉의 적거지를 알리는 이정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정표다.
임자도 사람들의 꿈을 그린 홍매도,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다.
우봉의 적거지 만구음관, 삭막하다. 우봉의 정취를 느꼈으면 좋겠다.
임자도 튤립 공원
카아네이션 동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