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상림에서
서라벌에서 머언 함양땅
최고운의 눈물과 소망이
천 년의 숲으로 피어난 자리
육두품의 설움 안고서
세상을 바꾸려 애쓴 날들
세상을 맑히는 지혜
한 자루 붓에 담아 귀국했건만
궁궐은 좁고 벽은 높았지
개혁의 꿈 접고 자연 속에
고운 마음 심었지
‘세상은 나를 잊어도 좋다
이 숲은 기억할 테니’
봄바람에 꽃이 피고
가을바람에 단풍 질 때
이 숲길 걸으며
바람이 전해준 진실을 들었다
‘개혁은 전쟁보다 어렵다’고
유학 이전
고운 최치원은 신라 문성왕 19년(857년) 경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경주 최씨 가문의 6두품 신분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소질을 보였고, 아버지의 기대에 따라 12세에는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당시 신라에서는 골품제로 인해 출신 성분에 따라 삶이 결정되는 구조였기 때문에, 최치원은 더 나은 기회를 찾기 위해 유학을 결심한 것입니다.
당나라 유학 시절
최치원은 12살의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하였고, 6년 만인 17세에 빈공과(외국인을 등용)에 급제하였습니다. 그는 이후 다양한 관직을 맡으면서 정치적 경험과 학문적 역량을 쌓았습니다. 특히, 그는 황소의 난(874-884) 중 황소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토황소격문’을 작성하여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의 뛰어난 문장력 덕분에 당나라에서 고위 관직에 연결될 기회를 가졌지만, 스스로 물러나 고병의 휘하에서 참모로 활동하게 됩니다.
귀국 후의 생애
885년에 귀국한 최치원은 신라 말기의 정치적 혼란 상황 속에서 개혁을 추진하려 했습니다. 그는 진성여왕에게 ‘시무 십조’라는 개혁안을 제시했지만, 귀족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후에는 함양의 태수로 임명되어 상림을 조성하는 등의 행정을 펼쳤지만, 결국 그는 불만족스러운 상황 속에서 가야산 해인사 인근에서 은둔 생활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전해지지 않아 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당나라 관리시절 작성하였던 『 계원필경(桂苑筆耕)』과 네 곳의 산에 위치한 비명을 모은 금석문집인 『 사산비명(四山碑銘)』의 내용과 연관되었을 것입니다.
『계원필경』에서는 당 사회의 혼란을 일으켰던 반적(叛賊)들을 다스리는 입장과 함께 인(仁)・효(孝)에 밝은 군왕의 자질을 강조하였다. 『사산비명』에서는 군왕이 유교적 정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있는 유학적 소양을 가진 6두품 유학 지식인을 등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시무십여조는 신라 왕실의 안녕과 신라 국가의 위상을 강조한 이념을 담았습니다. 그러나 왕권이 약화된 채 진골 세력이 거세게 반발하고 호족세력이 성장한 상황에서는 실현이 어려웠습니다. 다만 최치원을 계승한 최언위(崔彦撝)나 최승로(崔承老) 등 신라 출신 유학 지식인에 의해 고려의 국가 체제 정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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