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선농원

바람에 실린 노래

경산 耕山 2026. 3. 28. 12:01

어느 봄날, 농원에서 키위나무 가지를 치다 보면 잘려 나간 단면에서 맑은 수액이 맺힌다. 그것은 대지의 눈물 같기도 하고, 모진 겨울을 버텨온 시간의 목소리 같기도 하다. 뿌리는 어둠 속에서 묵묵히 길을 내고, 줄기는 바람을 받아내며 제 몫의 하늘을 넓혀 간다. 이 나무의 생애는 이 땅을 일궈온 이름 없는 민초들의 삶과 참으로 닮아 있다. 숱한 풍파를 나이테 속에 새기며 오늘에 이른 나무처럼, 우리 민족의 역사 또한 바람에 실려 오는 낮은 콧노래 속에 그 흔적을 남겨왔다. 해방 직후, 장터와 골목에서 민초들이 흥얼거리던 구전가요가 바로 그러한 역사의 나이테다.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 속지 마라
일본놈 일어난다
조선놈 조심해라

이 노래는 단순한 미움의 언어가 아니었다. 강대국들의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서 짓눌리지 않으려 몸을 웅크린 선조들의 처절한 방어기제이자, 무너지지 않기 위해 마음을 움켜쥔 서글픈 경계의 밧줄이었다. 폭풍우 앞에 가지를 모으는 나무처럼, 우리는 '경계'라는 단단한 껍질로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했다.

그로부터 팔십 년이 흘렀다. 세상은 몰라보게 변했고, 우리는 이제 세계가 주목하는 경제와 문화의 중심에 서 있다. 그러나 묘하게도 저 낡은 노래의 가락은 오늘날에도 잊힌 줄 알았던 그림자를 불러낸다. 현대의 거인들은 기술의 창과 자원의 방패를 휘두르며 우리에게 여전히 선택을 강요한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는 더 이상 폭풍우에 흔들리는 작은 조각배가 아니다. 과거의 노래가 외세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수동적인 방어였다면, 이제 우리가 불러야 할 노래는 바람을 읽으며 스스로 돛을 올리는 당당한 가락이어야 한다. 거인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지 않고, 굽이치는 물결 위에 제 길을 새겨 나가는 능동적인 노래여야 한다. 이에 낡은 가사를 지우고, 새로운 시대의 정신을 담아본다.

구름 너머 바람 읽고 신기루에 현혹 마라
마디마디 닻을 걸어 새벽 별을 앞질러라
믿음 위에 지혜 심고 의심 위에 실력 키워
갈라진 맘 맞잡을 때 우리 미래 축제 된다

오늘날 우리가 불러야 할 진정한 노래는 더 이상 밖을 향한 경계만이 아니다. 바깥의 파도보다 무서운 것은 안에서 일어나는 파문이다.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 가지들이 서로의 그늘을 탓하며 할퀸다면, 그 나무는 결국 균형을 잃고 고사하고 만다. 80년 전 "조선 사람 조심하라"는 경구는 역설적이게도 이념의 갈등 속에 서로를 할퀴던 동족상잔의 예고편이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멍들게 하는 분열과 혐오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외부의 파도가 덮치기 전에 내부에서 먼저 배가 가라앉을지도 모른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하나로 모이는 통합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외교이자 국방인 셈이다. 예부터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이 한 문장에 고스란히 담겨 전해 내려온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안으로는 근심하고 밖으로는 경계해야 하나,
가장 큰 환란은 백성의 마음이 흩어지는 데 있다."

나무는 바람을 탓하지 않는다. 대신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더 단단히 결을 묶는다. 잘려 나간 자리에서조차 다시 생을 이어갈 준비를 한다.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온다면 피하지 않고 흔들리는 법을 배우며, 부러지지 않기 위해 서로의 결을 살핀다. 그 속에서 비로소 새로운 노래가 잉태된다. 그것은 경계의 노래가 아니라 흩어지지 않으려는 다짐의 노래이며, 서로의 안쪽에서 은밀히 이어지는 연결의 목소리다.

농원의 과수가 비바람을 견디며 깊은 단맛을 빚어내듯, 우리 민족 또한 이 시련의 계절을 지나 더욱 단단하고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리라 믿는다. 그 결실이 우리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세계가 함께 맛보는 희망의 선물로 전해지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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