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가리의 여행
겨울의 끝자락,
메마른 덩굴 끝에
낡은 외투를 걸친 채 매달려 있습니다.
한때는 초록의 생명력을 뽐내던 방울이었으나
이제는 스스로의 몸을 열어 속살을 드러냅니다.
툭, 하고 터진 단단한 껍데기 너머로
시린 바람을 견뎌낸 은빛 솜털들이
햇살을 머금고 눈부시게 일렁입니다.
먼 길을 떠나려는 저 하얀 날개들은
언 땅 어디쯤에 제 몸을 누일까요.
추위가 가시지 않은 2월의 들판 위로
박주가리는 마지막 온기를 실어 보냅니다.
비움으로써 비로소 시작되는 여행,
거친 껍질만 남은 마른 열매 위로
봄을 향한 하얀 항해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겨울 박주가리의 씨앗은
마치 ‘희망의 전령’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