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으로 흐르는 봄의 노래
입춘과 우수를 지나왔건만, 산그늘 깊은 비선농원의 아침은 여전히 서늘하다. 두툼한 겉옷을 여미고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하루를 연다. 흙의 안부를 묻고 나무의 숨결을 듣는 이 시간, 발끝에 닿는 땅은 어제보다 한결 부드럽다. 계절은 눈보다 먼저 발바닥으로 전해진다.
농원에는 살구와 복숭아가 저마다의 봄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내 발걸음은 늘 한곳에서 멈춘다. 가지를 낮게 늘어뜨린 능수매화 앞이다. 연분홍 꽃잎이 바람에 흔들릴 때, 그것은 마치 수줍은 여인의 고운 소매 끝이 조용히 흘러내리는 듯하다. 처져 있으되 꺾이지 않고, 부드럽되 흐트러지지 않는 곡선. 그 자태는 화려함보다 깊은 품위를 품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위로 솟는 기상을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이 나무 앞에서 다른 배움을 얻는다. 힘이란 높이 오르는 데 있지 않고, 제 무게를 감당하며 아래로 내려올 줄 아는 데 있다는 것을. 낮게 몸을 숙일수록 향기는 멀리 번지고, 굽은 가지 끝에서 오히려 꽃은 더 환하게 터진다.
안개가 엷게 내려앉은 아침이면 능수매화는 비로소 제 빛을 드러낸다. 희미한 기운 속에서 번지는 꽃빛은 또렷함보다 오래 남고, 가지마다 맺힌 꽃송이는 소란을 지운 채 고요를 깊게 한다. 아직 남아 있는 서리의 냉기와 막 피어나는 생명의 온기가 한 가지에서 맞닿는다. 겨울을 건너온 시간들이 그 안에 잠잠히 스며 있다.
그 곁에 서면 은은한 향기가 안개처럼 번져 마음에 닿는다. 드러내지 않되 사라지지 않는 향기. 능수매화는 말없이 일러준다. 삶 또한 그러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드러내지 않아도, 낮은 곳으로 스며드는 온기 하나로 충분하다고.
나는 주머니에서 하모니카를 꺼냈다. 입술 사이로 스며드는 첫 숨에 동요 ‘고향의 봄’의 느린 선율을 얹는다. 낮게, 더 낮게 흐르는 음 하나. 그 길고 가느다란 숨결 위로 능수매화의 연분홍 꽃빛이 조용히 내려앉는다. 들이마신 숨에는 아직 겨울의 서늘함이 남아 있고, 내어보낸 숨 끝에서는 봄이 풀린다.
음과 음 사이의 여백마다 보이지 않는 향기가 번져, 가지 끝에서 다시 아래로, 다시 낮은 곳으로 흐른다. 길게 끈 한 음이 안개 속으로 스며들 때, 꽃은 소리 없이 피어나고 향기는 말없이 멀어진다.
나는 더 이상 곡을 연주하지 않는다. 숨을 건넬 뿐이다. 능수매화의 가지가 대지를 어루만지듯, 내 호흡 또한 낮은 곳을 향해 닿는다. 그 순간, 자연과 나는 하나의 숨이 된다. 보이지 않는 선율이 꽃가지를 따라 조용히 흐른다.
올봄에도 나는 비선농원을 일구고 시를 심을 것이다. 굽이진 길을 돌아온 이들이 잠시 머물다 갈 수 있도록, 이 낮은 자리에서 조용한 향기를 지키며....... 능수매화처럼 낮게, 더 낮게. 대지를 향해 흐르는 꽃처럼, 보이지 않는 곳까지 스며드는 삶을 살고 싶다.
봄은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부터 조용히 번져오는 것을 나는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