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미학
- 정조의 <국화도(菊花圖)>
서리 맞은 가을날
바위 곁 들국화 셋
속세를 지운 여백
세상 밖 고요한 빛
묵향 따라 숨어든
가을의 속삭임
임금의 붓 끝에 피어난
군자의 향기

묵향 속 고요함
조선 후기의 군주 정조는 정치적 긴장과 개혁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다.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그는, 규장각을 설치하고 실학을 진흥시키며 문예 부흥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국화도>는 정치적 야망보다 더 깊은 내면의 세계를 보여준다. 먹으로 그린 세 송이 들국화, 바위 곁의 고요한 자태, 그리고 넓은 여백은 수묵화를 너머 정조의 철학과 심정을 담은 정신적 풍경이다.
이 그림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무엇보다 <국화도>는 속세의 번잡함에서 벗어나라는 초대다. 현대 사회는 과잉 정보와 끊임없는 경쟁, 자극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늘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과는 단절된 채 살아간다. 이 그림은 묵향 속에 피어난 들국화를 통해 고요한 내면의 공간을 제시한다. 여백은 빈 공간이 아니라 마음의 자리이며, 그 안에서 피어난 국화는 절개와 품격을 상징한다. 또한 이 그림은 절제와 단순함의 미학을 일깨운다. 이는 덜어냄의 미학, 비움의 가치, 그리고 단순함 속의 깊이를 보여준다. 오늘날 소비와 과시가 미덕처럼 여겨지는 시대에, 절제된 삶의 아름다움을 되새기게 한다.
<국화도>는 자연과의 조화, 은일의 삶을 제안한다. 바위 곁에 피어난 들국화는 자연과 하나 된 존재이며, 묵향 따라 숨어든 그 자태는 자아 성찰의 모습이다. 도시화와 디지털화로 단절된 현대인에게 이 그림은 자연과의 연결, 고요한 삶의 회복을 전한다. 그것은 군자의 절개처럼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중심을 지키며, 여백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으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묵향 속 고요함은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삶의 자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