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기행

엇갈린 시선

경산 耕山 2025. 10. 22. 21:46

엇갈린 시선
- 르누와르의 <선상파티의 점심>


샤투 섬
, 선상 레스토랑
물결 위에 떠 있는 오후
테이블 위로
파리지앵의 일상이 흘러든다

밝은 표정, 따뜻한 대화
허공에 떠도는 시선들
서로 다른 계절을 사는 듯
마주보는 눈은 없다

가벼운 웃음 속에
엇갈린 시선
가까운 거리
먼 마음
눈맞춤 없는 파티

함께 있는 외로움
따뜻한 햇살만이
말 없는 틈을 메운다

르누아르 《선상 파티의 점심》 1881년 130 x 172 cm 워싱턴 필립스 컬렉션

우리는 진정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르누아르는 가난한 삶 속에서 행복만을 그린 화가였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히 남는다.' 신념으로 그림을 그렸다.  모네가 풍경의 인상을 그렸다면 르누와르는 인물의 인상을 주로 그렸다. <선상 파티의 점심>은 그런 화가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파리 근교 샤투 섬의 선상 레스토랑에서 펼쳐지는 여유로운 한때를 담고 있다. 이곳은 당시 파리지앵들이 즐겨 찾던 인기 휴양지였다. 르누아르는 이 그림 속에 자신의 실제 친구들을 모델로 삼아 생생한 일상의 풍경을 그려냈다. 강아지를 안고 있는 여성은 그의 미래의 아내 앨린 샤리고이며, 모자를 쓴 남성은 인상주의 화가 귀스타브 카유보트다. 그 외에도 시인, 배우, 언론인 등 당대의 문화 인사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그림은 단순한 식사 장면을 넘어선 사회적 풍경으로 확장된다.

르누아르 특유의 따뜻한 색채와 부드러운 붓터치는 햇살이 가득한 테라스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하며, 인물들의 표정과 동작은 사진처럼 생동감 있게 표현된다. 소소한 일상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인상주의의 철학이 이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인물들은 서로 대화하고 웃으며 식사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엇갈리고 눈맞춤은 없다. 이는 함께 있음 속의 고독, 인간 관계의 미묘한 거리감을 암시하며, 따뜻한 분위기 속에 숨어 있는 정서적 단절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선상 파티의 점심>은 인상주의의 따뜻한 색채와 생동감 넘치지만, 그 안에는 현대인이 공감할 만한 깊은 메시지가 숨어 있다. 그림 속 인물들은 여가의 풍경을 넘어, 함께 있는 듯하지만 서로에게 닿지 않는 인간 관계의 단절을 암시한다디지털 시대의 소통은 빠르고 넓지만, 깊이는 얕아질 수 있다. 그림 속 인물들처럼, 우리는 함께 있지만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 순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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