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기행

획의 장단, 여백의 숨결

경산 耕山 2025. 10. 15. 13:16

획의 장단, 여백의 숨결  
    - 추사의 <竹爐之室>1


두 획이 비껴 서서 바람을 세우고
댓잎의 곡선이 허공을 스친다


화롯불 위에 놓인 주전자
가로획은 숨결처럼 들고난다


차향이 모락모락
찻잔과 나 사이를 이어준다


지붕 한 줄기 길게 눕히고
넓은 창 너머 고요가 보인다.

추사  < 죽로지실 > 1840 년대  33*133.7Cm  리움 소장

차향과 정신이 깃든 글씨

추사 김정희의 편액 글씨 <죽로지실(竹爐之室)>은 그의 절친한 벗 초의선사에게 써준 다실의 이름이다. 초의선사는 조선 차 문화를 중흥시킨 인물로, 추사와 깊은 교유를 나눴다. <죽로지실>대나무 화로가 있는 방이라는 뜻이다. 찻물이 끓는 소리를 대숲에 부는 바람에 비유한 시적 운치가 담겨 있다. 추사는 평생 차를 사랑했고, 유배 중에도 초의에게 차를 보내달라는 시를 쓸 만큼 우정을 이어갔다. 이 편액은 차를 매개로 한 두 사람의 교감과, 추사가 추구한 고요하고 탈속적인 정신세계를 상징한다.

이 편액은 각 글자를 독립적인 조형 예술로 승화시킨 걸작이다. ()자는 좌우 비대칭으로 대나무의 강직함과 유연성을 표현한다. ()자는 작은 부와 무게감 있는 부분의 대비로 다실의 온기와 차향을 드러낸다. ()자는 전서 필법을 변주해 공간의 흐름을 잇는 시각적 이음새 역할을 한다. ()자는 다실 내부 구조와 창을 연상시키는 형태로 차와 고요가 머무는 공간을 그려낸다. 추사는 전서·예서·해서를 자유롭게 혼용했다. 획의 장단, 곡선의 굽힘, 여백의 숨결을 생동감 있게 담아냈다. 네 글자가 모여 하나의 정신적 다실을 이루며, 차향과 인격이 머무는 공간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죽로지실(竹爐之室)> 편액은 그가 초의선사에게 써준 다실 이름으로 유명하지만, 현재 편액 원본 소장처는 명확하지 않다. 현재 충남 예산의 추사고택이나 여러 박물관에서는 이 편액의 복각본(새겨서 만든 복제품)이나 탁본이 전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학계나 문화재 당국에서 공식적으로 <죽로지실>진본이 여기에 있다'고 발표한 기록은 없다. 비록 탁본의 감상일지라도 추사의 고난 속 우정과 예술 정신을 느낄 수 있고, 창작에 영감을 제공하는 역할은 진본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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