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기행

녹우당 가는 길

경산 耕山 2025. 10. 9. 14:52

綠雨堂 가는 길

추석 연휴는 비로 시작해 비로 끝나는 듯했다. 풍류를 아는 후배 부부와 함께 연중 행사로 떠나는 남도 여행길에 올랐다. 여행을 막으려는 듯 비는 억수같이 퍼붓고, 차창 너머 풍경은 물안개에 잠겼다. 10월에 장마처럼 내리는 비, 영글어가는 가을 벌판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내장산을 지날 즈음, 다행히 비가 그쳤다. 고속도로 주변 산하가 온통 수묵산수화처럼 펼쳐졌다. 월출산에 이르자 운무가 걷히며, 톱니같은 바위 봉우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 시간 감춰놓았던 남도의 얼굴이 비로소 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가을장마는 삶의 속도를 잠시 늦춘다. 남도행의 시작은 그렇게, 비와 함께였다. 비는 남도의 풍경을 닦아내며, 여행의 문을 열었다.

백운동 원림 수소당에 스며든 추사의 필획과 선비의 풍류
월출산 옥판봉 남쪽, 안개 걷힌 능선을 따라 백운동 원림에 닿았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별서정원답게, 이곳은 자연과 인공의 경계가 흐릿하다. 다산 정약용이 그 경치를 아꼈다던 말이 실감날 만큼, 계곡과 정자와 돌담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그 중심에는 차를 마시는 작은 정자, 수소당(水素堂)이 자리한다.
수소(守素)’즉 본래의 바탕을 지킨다는 선비의 정신이 깃든 공간이다. 수소당의 현판은 조선 최고의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제주 유배길과 해남 대흥사에서 초의선사와 교류하던 추사는, 백운동 원림의 주인 이시헌과도 인연을 맺으며 이곳에 글씨를 남겼다. 간결하면서도 기개 넘치는 추사체의 필획은, 수소당이 지향하는 고결한 정신을 그대로 드러낸다. 정자 앞 물길은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전통을 이어받아, 잔을 띄우고 시를 읊던 선비들의 풍류가 흐르던 자리다. 이곳에서 선비들은 자연을 벗 삼아 사유하고, 시를 읊고, 차를 마시며 본질을 지키는 삶을 실천했으리라. 물은 굽이쳐 흐르고, 잔은 그 물길을 따라 유유히 떠다닌다. 그 사이사이, 다산의 학문과 추사의 예술, 제자들의 시심이 어우러졌을 것이다.
정선대에 올라 바라본 월출산의 바위 능선은 마치 추사의 필획처럼 단정하면서도 강인하다. 백운동 원림은 단지 아름다운 정원이 아니다. 그것은 당대 지식인들이 교류하고, 본질을 지키고자 했던 이상향이다. 수소당에 앉아 있으면, 물소리 사이로 추사의 웃음과 다산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이곳은 풍경이 아니라 정신이 살아 숨 쉬는 남도의 풍류정원이다.

추사의 친필 편액, 본래의 바탕을 지킨다는 선비의 정신이 깃든 공간이다.
유상곡수하던 못에 가을빛이 맑다.
수소당, 조선 선비의 소박한 정신이 담긴 찻집

남도의 맛, 강진의 품격 청자골종가집에서의 미식 여행
내가 강진에 오면 찾아가는 맛집이 있다. 남도 여행길에 빠질 수 없는 맛고을, 강진. 그 중심에 자리한 청자골종가집은 남도의 풍요와 정갈한 종가의 손맛이 어우러진 미식의 성지다. 상다리가 휘어질 듯 차려지는 화려한 밥상은 마치 고려청자에 금은보화를 가득 담아낸 듯한 시각적 향연이다. 산과 바다, 땅과 시간의 맛이 한데 어우러져 천··인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밥상 위의 조화는 남도 미식이 연주하는 교향악 같다.
100년 고택의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차려지는 이 한정식은, 마치 사대부 집안의 잔치에 초대된 듯한 품격을 선사한다. 적당히 삭힌 홍어삼합과 보리굴비, 양념게장까지 강진 향토의 정수가 정갈하게 담겨 있고, 음식 하나하나에 깃든 정성과 품위는 귀한 손님으로 대접받는 듯한 따뜻함을 안겨준다. 상을 물릴 즈음이면, 입은 만족하고 마음은 풍요로워진다. 청자골종가집에서의 식사는 곧 남도 여행의 절정이자, 강진의 이야기를 온몸으로 맛보는 순간이다. 무엇보다도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즐기는 한 끼, 그것이 진정 행복이었다.
점심의 행복한 여운을 간직한 채, 다산초당을 찾았다. 비가 갠 다산초당은 마치 세월의 안개가 걷힌 듯 고요하고 단정했다. 촉촉이 젖은 숲속 오솔길을 따라 오르니, 짙은 녹음 사이로 다산과 추사의 글씨가 새겨진 편액이 반갑다. 그 글씨는 두 선비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인문적 자취였다. 다산이 기거하던 동암 마루에 앉았다. 마루 밑인가 숲속에서는 가느다란 벌레소리가 맑게 울린다. 고요한 풍경 속에서 다산의 깊은 학문과 추사의 다산에 대한 존경이 어우러지며, 나는 두 선비와 조용히 마주 앉은 듯한 기분에 잠겼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다산의 외가로 향했다. 강진 유배 시절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해남 윤씨 종가 녹우당이다.  200년 전 다산과 녹우당과의 교류를 떠올리며 다산초당에서 녹우당 가는 길을 달린다. 남도의 풍경이 눈앞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도 펼쳐지기 시작했다.

낙관 '即果老人' 은 다산의 말년 호이다. “곧 열매를 맺는 노인”, 학문과 덕행의 결실을 맺은 원숙한 지식인이라는 뜻이다.
<다산동암>, 다산의 날카로운 비판정신이 느껴지는 필치다.
추사 친필, <보정산방>, 정다산을 보배로 여기는 공부방이란 뜻으로 추사가 다산을 존경하는 마음을 담았다.

고산유물관에서 마주한 두 시선 공재의 눈, 겸재의 숨결
고산유물관은 과거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날로 변신을 하고 있었다. 이곳은 해남의 정신과 예술이 살아 숨 쉬는 역사적 무대다. 조선의 문학가 고산 윤선도와 화가 공재 유두서의 작품을 통해 남도의 미학과 정신이 살아 있는 공간이다. 윤고산의 시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노래하며, 남도의 풍경을 시심으로 물들였고, 고산의 증손 공재의 그림은 그 시의 정취를 붓끝으로 풀어내며 남도의 산수와 정서를 화폭에 담아냈다. 이곳에 서면, 시와 그림이 하나 되어 남도의 시간 속으로 우리를 조용히 이끈다.
해남 윤씨의 가계와 유물전시방을 지나면 공재의 그림 전시방으로 이어진다. 공재의 풍속화 <나물캐기>(채애도 採艾圖)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물캐기>는 종달새 하늘 높이 지저귀는 봄날, 비탈진 들녘 위에서 허리를 굽혀 나물을 캐는 두 여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치마를 걷어 올린 복장, 굽은 허리, 주변을 살피는 뒷모습까지그림 속 인물들은 당시 서민들의 삶을 그대로 재현했다. 양반 사대부였던 공재가 평민 여인의 노동을 진지하게 조명했다는 점에서, 이 그림은 높이 평가받는다. 실사구시의 정신과 백성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공재의 붓끝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비탈진 들녘에 굽은 허리
삶을 캐는 여인들
치마 걷어 올린 진솔한 몸짓 
예술이 된 노동
고개 돌린 뒷모습에 담긴 여인의 시선
고난 속에도 생명을 품은, 조선의 첫 풍속화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중 여인이 등장하는 <빨래터>가 있다. 이 그림은 시냇가에서 여인들이 빨래를 하는 모습을 해학적으로 묘사한 작품으로, 공재 윤두서의 <나물캐기>와 비교해보면 두 화가의 시선과 표현 방식의 차이를 알 수 있다. <빨래터> 속 여인들은 밝고 경쾌한 분위기 속에서 일상의 한 장면을 살아간다. 단원은 여인들의 동작을 익살스럽고 유쾌하게 포착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인물의 표정과 자세는 과장되었고, 배경은 간결하게 처리되어 풍속화의 오락성과 감상성을 강조했다. 반면, 공재의 <나물캐기>는 척박한 들판에서 허리를 굽혀 나물을 캐는 여인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노동의 고단함과 생존의 절박함을 진지하게 담아냈다. <빨래터>는 웃음과 여유를, <나물캐기>는 사유와 공감을 이끌어낸다. 두 그림은 조선 후기 풍속화가 백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감상의 재미를 더한다.

공재 윤두서의 <나물캐기>
단원 김혿도의 <빨래터>

고산유물관에서 공재와 겸재의 그림을 특별 전시 중이었다. 풍속화 전시 공간 끝에 자리한 전시실 검은 휘장 안에서 두 개의 시선이 조용히 마주 선다. 하나는 인간의 내면을 꿰뚫는 눈빛,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다른 하나는 자연의 기운을 먹빛으로 응축한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이 두 그림 앞에 서면, “나는 누구인가우리 산천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어둠 속에 은은히 울린다.
공재의 자화상은 그가 40대 중반, 예술과 학문에 깊이 몰두하던 시기에 그렸다. 양반 사대부로서의 위엄을 내려놓고, 거울 앞에 앉아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듯 그린 이 초상은 조선 회화사상 가장 이례적이고 진지한 자아 성찰의 기록이다. 반면 겸재의 인왕제색도는 비가 갠 후의 인왕산 모습을 그린 진경산수화의 최고 걸작이다. 75세의 노년에 오랜 친구의 쾌유를 기원하며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두 그림은 각각의 생애에서 가장 깊은 사유와 예술적 성취가 응축된 순간을 담고 있다.
공재의 <자화상>자기라는 산을 오르는 인간의 고독한 여정이며, 철학을 담은 마음의 풍경화다. 그의 눈빛은 오래된 거울 같고, 그 속에는 自知者明(자신을 아는 이는 밝다)”는 노자의 말처럼 깊은 성찰이 스며 있다. 반면 겸재의 <인왕제색도>는 먹기운이 자연의 호흡이자 화가의 심장 박동처럼 화면을 흐르고, “山靜似太古, 雨氣如新秋(산이 고요하니 태고와 같고, 비의 기운은 갓 시작된 가을처럼 신선하다.)”라는 구절을 증명하듯 조선의 산천을 조선의 시선으로 되살려 놓았다.

공재와 겸재의 만남
공재의 <자화상> 국보 240호
겸재의 <인왕재색도> 국보 216호

이 두 그림이 해남의 하늘 아래 한자리에 전시했다는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조선 선비정신의 두 갈래내면의 자각과 자연의 자존이 하나의 대화로 이어지는 시간이 아닐까. 공재가 그린 눈빛이 인간의 내면을 비춘다면, 겸재의 먹빛은 자연의 얼굴을 비춘다. 두 빛은 서로를 비추며 인간과 자연의 일체감, 자성과 자존의 미학을 완성한다.
고산유물관은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품고 있었다. 전시실 밖으로 나왔다. 가을을 스치는 바람은 윤두서의 숨결처럼 느껴지고, 하늘 가득 드리운 구름은 인왕산의 안개처럼 흩어진다. 예술은 결국 자기 자신을, 그리고 세상을 깊이 사랑하는 한 방식임을 나는 깨달았다. 남녘 하늘 아래, 공재의 눈빛과 겸재의 먹빛은 그렇게 조선의 정신을 공유하고 있었다.

해남의 바람 속에 마주한 두 시선
공재의 눈빛은 내면을 꿰뚫는 거울
겸재의 인왕은 우정이 숨 쉬는 풍경
두 빛은 하나 되어 내 안에 새겨진다

녹우당을 찾을 때마다 단단히 닫혀 있던 이 종가의 문이 오늘은 열려 있다. 내 앞에 시간의 문이 함께 열린 듯했다. 덕음산을 배경으로 비자나무 숲 자락에 자리한 녹우당, 솟을대문을 지나 사랑채 마루에 오르면, 고요한 시간의 결이 느껴진다. 왼편 정원에는 키가 큰 회화나무 한 그루가 선비의 사랑채를 지키고 있다. 소박하면서도 기품 있는 구조다. 효종이 세자 시절 스승인 고산에게 하사한 건물을 해남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그후 공재의 절친 옥동 이서(동국진체의 창시자)의 힘찬 필치로 새겨진 녹우당(綠雨堂)’ 현판을 달았다. 녹우당 편액이 붙은 방안에 공재의 자화상이 걸려 있는 듯한 기운이 감돌고, 벽 너머로 고산의 시조가 들려오는 듯하다. ‘녹우당은 자연과 예술, 정신이 어우러진 남도문화의 심장이라고, 마루끝에 이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며 빗소리처럼 속삭인다.

키 큰 회화나무, 녹우당을 지키고 있다.
동국진체의 창시자 옥동 이서 친필 <녹우당> 편액, 고산의 문학정신을 담아낸 시적인 이름이다.
녹우당 마루에 앉아 고산의 풍류에 젖어 보다.

해남 윤씨 종가의 고택, 비자나무 숲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잠결에 빗소리로 들었다는 옥동 이서, 푸른 비의 속삭임을 살려 이 집은 녹우당(綠雨堂)이 되었다. 현판에 새겨진 옥동의 글씨는 자연의 운치와 선비의 정신이 응축된 예술이다. 동국진체의 힘찬 필획은 고산과 공재가 남긴 문화적 자부심을 품고 있다. 효종이 고산에게 하사한 사랑채, 그 위에 절친이 지어준 <녹우당> 편액을 걸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곳은 예술과 우정, 정신과 품격이 교차하는 공간의 의미를 더한다. 마루에 앉아 옥동의 글씨를 바라보며, 나는 조선의 풍류와 사유를 이어받은 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녹우당은 그렇게, 푸른 비처럼 조용히 마음을 적셔주는 집이었다. 그 사랑채 마루에 부는 바람, 푸른 잎을 흔드는 소리에 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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