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실의 고요, 차향의 여운
- 추사의 <竹爐之室>2
竹 —
한 줄기 푸르름 바람을 세우고
속을 비워 모든 소리를 품는다
爐 —
작은 불씨 하나 찬 기운 녹이고
차 한 모금 속에 꽃이 피어난다
之 —
가는 붓끝이 구름을 잇듯
그대와 나를 잇는 마음의 다리
室 —
소리 대신 다향 머무는 방
고요 속에서 마음을 비운다

고난 속 우정과 예술 정신의 집약
추사가 <죽로지실> 편액을 썼던 19세기 중반은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혼란이 이어지던 시기였다. 그는 1840년 제주도로 유배되어 9년간 고초를 겪었고, 1848년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1851년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유배는 그에게 정치적 좌절과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학문과 예술을 깊이 탐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제주 유배 시절은 ‘추사체’라는 독창적인 서체를 완성한 결정적 시기였다. 그 시기에도 초의선사와의 교류는 계속되었고, 두 사람의 우정은 추사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죽로지실> 편액은 혼란한 시대와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차와 예술을 통해 내면의 평화와 정신적 깊이를 추구하려 했던 추사의 선비 정신을 담고 있다. 이 글씨는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서체 혼용을 통해 조형미를 극대화한 예술 작품이다. 추사는 전서, 예서, 해서의 요소를 자유롭게 섞어 각 글자에 상징을 담았다. 대나무(竹)는 선비의 절개, 화로(爐)는 다실의 온기, 이음(之)은 유연한 흐름, 방(室)은 고요한 공간을 표현한다. 특히 초의선사와의 교유 속에서 써준 다실명으로서, ‘굽이와 여백, 힘과 숨’의 리듬을 통해 차 앞에서 마음을 비우는 순간을 담아낸다. 이 작품은 ‘서예는 곧 도(道)’라는 추사 예술의 정신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현대인은 디지털과 속도 중심의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자극받고 있다. 그런 시대에 <죽로지실>은 ‘멈춤의 미학’과 ‘내면의 정돈’을 상기시킨다. 차 한 잔을 끓이는 시간, 글씨의 여백을 바라보는 순간, 그 안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과 마주하고, 삶의 본질을 되묻는 여유를 얻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