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기행

뿌리 없는 봄

경산 耕山 2025. 9. 25. 12:52

뿌리 없는 봄
   - 민영익의 <노근묵란도(露根墨蘭圖)>


잎은 칼날 같고
칼날은 물결 같다
땅을 잊은 난초는
허공에 뿌리를 내렸다

흙을 잃고도 피어난 꽃
소리 없이 터진 생의 결기
상처를 안고 피어난 향기

뿌리 없는 가슴
낯선 하늘 아래 고요히 뛴다
그대는 어디에 뿌리를 두었는가

말 없는 난초
운미의 침묵이 남긴 서명

운미 민영익 < 노근묵란도 ( 露根墨蘭圖 )> 128.5*58.4㎝ 리움 소장

운미 민영익의 <노근묵란도(露根墨蘭圖)>는 망국의 통한과 망명자의 자기고백을 담은 깊은 정신적 유산이다. 이 작품은 뿌리가 드러난 난초, 노근란을 그린 것으로, 중국 남송 화가 정사초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정사초가 몽고족의 지배를 거부하며 땅에 뿌리 내리지 않은 난을 그렸듯, 운미 역시 일제강점기 망국을 슬퍼하며 자신의 마음을 난초에 투영했다. 운미는 상하이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짙은 먹으로 굵고 강직한 난잎을 그려 올리다가 끝에서 휘게 처리하는 독특한 화법을 구사했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대원군의 석파란과는 구별되는 운미만의 절제된 고통과 결기를 보여준다.

난초는 예로부터 고결한 인격과 충절을 상징해왔다. 예기와 주역의 기록처럼, ‘난향은 착한 사람의 말과 같고, 훌륭한 벗과의 교류는 난초가 놓인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했다. 운미는 이러한 난의 상징성을 빌려, 조국을 잃은 자의 고통과 절망을 말 없이 그려냈다. 1910년 한일합방의 비보를 접한 그는, 흙 한 줌 없이 드러난 뿌리와 눈물 젖은 난꽃으로 망국의 아픔을 표현했다. 그에게 난초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뿌리 뽑힌 자신의 분신이었다.

결국 <노근묵란도>는 단아한 자태와 그윽한 향기를 넘어, 운미 민영익의 마지막 고백이자 침묵의 절규이다. 뿌리 없는 난초처럼, 그는 고국을 잃고도 뜻으로 자라난 존재였다. 이 그림은 그가 남긴 가장 깊은 자취이며, 망명자의 심장을 대변하는 묵란의 서명이다.<노근묵란도>에는 운미의 인장 외에도 안중식, 오세창, 이도영, 최린 등 당대 명인들의 낙관과 화제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작품의 예술적·역사적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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