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기행

조선의 묵향을 따라 걷다

경산 耕山 2025. 9. 24. 02:26

조선의 묵향을 따라 걷다
    — 성암미술관 '四君子展' 답사기행

그림은 마음의 향기다. 붓끝에서 피어난 정신은 시간을 넘어 우리에게 말을 건다.”
이 말을 떠올리며, 나는 성암미술관으로 향했다.
지난 달, 성암미술관에서 조선시대 四君子展이 열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꼭 한번 방문하고 싶었다.
평소 고미술품에 관심이 있어서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여행 일정으로 여유를 가질 수 없었고, 난데 없는 폭우가 겹쳐 답사를 미뤄왔다. 그러다 문득 마음이 움직였다. 묵향이 그리워졌고, 조선의 붓끝이 보고 싶어졌다.
대전 유성구 갑천변에 자리한 성암미술관은 화려한 홍보보다 조용한 품격으로 시간을 견뎌온 곳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그 고요함 속에 담긴 예술의 깊이는 결코 작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四君子의 향연이 펼쳐졌다. 매화·난초·국화·대나무......
조선 문인의 정신이 피어난 그 공간은 오래된 시집 속으로 들어간 듯했다.

그림은 말이 없지만, 그 앞에 선 사람은 오래도록 말을 잊는다. 성암미술관은 그런 곳이었다.
묵묵히, 그러나 깊게. 예술이 숨 쉬는 묵향 짙은 마음의 뜰이었다.
관장님과 함께한 감상은 최고의 예술기행이었고
조대우 관장님의 해설은 격조 있는 문답이었다.
왕실과 명사들이 소장했던 작품들의 이력까지도 섬세하게 풀어내셨고,
추사, 석파, 단원의 진품을 직접 대면하며 감상할 수 있었던 순간은
조선의 서재에 앉아 선비들과 묵향을 나누는 듯한 경험이었다.

전시 팜플랫 표지 그림 어몽룡의 <월매도>부터 살펴보았다.
달빛 아래 피어난 매화를 통해 그윽한 선비의 마음을 담은 그림이다.
오만원권 지폐 뒷면에서 익숙했던 그 매화자세히 들여다보니 지폐 그림의 배경엔 대나무가 은은히 겹쳐 있었다.
성암미술관에서 마주한 작품은 그의 <월매도> 연작 중 하나로지폐 속 이미지보다 더 깊고 고요한 운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림은 말이 없었지만, 나는 그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오원 장승업의 <노매도>는 시간과 생명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시적 풍경이었다.
이른 봄, 고요한 순간에 피어나는 생명의 경이로움을 고목을 통해 섬세하게 표현했다.
고목 위에 피어난 매화는 침묵 속에서 터져 나온 희망처럼 조용하지만 강렬하다.
오원은 화려함 대신 절제된 선과 여백으로 표현된 꽃잎은 생명의 떨림과 기쁨을 전한다.
고목과 꽃의 대비는 생명의 순환에 대한 경이를 불러일으킨다. 붓질은 감정의 흐름이다.
고목은 무겁고 깊게, 꽃은 가볍고 섬세하게 그려져 그림 전체에 생동감을 더한다.
<노매도>는 매화의 피어남을 통해 고통과 인내 끝에 다시 피어나는 삶의 가능성을 말한다.
오원의 그림은 조용히 묻는다. 당신의 가지 끝에는 어떤 꽃이 피어나고 있는가.
이밖에도
매화와 새를 함께 그려 은둔과 관조의 미학을 담은 창강 조속의 <고매서작도>,
매화 분재 하나에 3000냥을 아낌없이 내주었다는 매화광의 단원의 <매작도>,
여성 화가의 감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천경자의 <홍매>까지.....
매화의 아름다움 속에 담긴 선비 정신을 돌아보는 흐뭇한 시간이었다.

추사의 <묵란도 대련> 앞에 섰다난초의 선이 곧 사람의 마음처럼 느껴졌다.
화제시를 보면, 추사는 황산 김유근과 지란지교의 꿈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난초는 군자의 꽃이라지만, 이 난은 친구를 향한 그리움이었다.
서예의 필치로 그려낸 난초는 글씨와 그림의 경계를 허물며
추사의 철학과 감정, 그리고 고독이 한 줄기 난초에 진하게 배어 나온다.
절친 김유근이 세상을 떠난 뒤, 추사는 유배지에서 그를 그리워하며
더 많은 난초를 그리고, 더 많은 글을 썼다. 그의 붓끝은 점점 더 가늘어졌고, 난초는 점점 더 고요해졌다.
그 난초는 바람도 없이 흔들렸고, 그의 마음은 말 없이 울었다.
추사의
<묵란도 대련>은 그래서 아름답다예술 이전에 우정의 흔적이고, 한 사람의 고독한 삶이 피워낸 꽃이었다.

위창 오세창의 찬문이 달린 석파 이하응의 <군란도>는 바닥에 길게 펼쳐져 있고운미 민영익의 <건란도 병풍>은 그 옆자리를 차지하고 서 있었다두 사람의 붓끝에서 피어난 난초의 잎은 멀리서 보면 닮은 듯하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확연히 달랐다. 난잎은 구한말이라는 격랑의 시대를 살아낸 내면의 풍경이자 시대정신의 은유였다.
석파의 <군란도>는 단정하고 고고하다. 추사 난맹첩의 <적설만산>을 연상케 한다.
석파의 난잎은 곡선과 직선이 교차하며, 부드러움 속에서도 강인하다잎의 방향과 속도, 농담에 변화를 주는 삼전의 붓놀림 속에 난초의 생동감과 기품이 살아 있다. 이는 석파의 정치적 기개와 문인으로서의 품격을 보여준다왕실의 권위와 정치의 무게를 짊어졌던 그는 난초를 통해 권력 너머의 고독과 성찰을 담아냈으리라.
석파의 유려한 난잎에 비하면 운미의 난잎은 단순하고 단호하다. 붓의 방향은 일관되며, 먹의 농담도 한결같다. 시대의 고통을 찢고 나오는 듯한 필치로, 망명자의 절박함과 분노가 느껴진다. 삼전법의 운치는 사라지고, 대신 직설적인 감정이 난잎에 배어 있다.운미의 <건란도 병풍>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드러난 뿌리다. 일반적으로 난초는 바위 틈이나 흙 속에 은근히 뿌리내리지만, 운미는 뿌리를 밖으로 드러냈다. 이는 뿌리 내릴 곳 없는 망명자의 심경이리라. 운미는 나라를 잃고 상하이로 망명한 뒤, 더 이상 뿌리내릴 곳이 없다는 절망을 난초의 뿌리로 표현했다. 드러난 뿌리는 상처와 고통을 그대로 드러내는 자기 고백이었다.

청나라 문인 정섭의 <건란도>를 보며, 이 그리미 어떤 경로로 조선에 흘러들어왔을까? 난초를 통한 동아시아 문인화의 교류와 예술적 교감을 상상해보았다.

표암 강세황의 <묵죽도 대련>은 대나무가 하나의 정신처럼 다가오는 작품이다.
대나무 줄기는 세 마디로 나누는 전통 기법을 따랐지만, 마디의 길이와 굵기를 자연스럽게 변화시켜 생동감을 준다. 리듬감 있는 붓놀림으로 대나무의 생명력을 표현했다먹의 진하고 옅은 농담, 줄기와 잎의 대비를 통해 대나무의 강직함과 유연함을 함께 드러냈다. 자연을 그대로 옮기기보다, 자연을 통해 인간을 말하고자 했던 표암은 대나무에 사대부의 이상인 겸손과 강직함을 담아냈다. 또한 청나라 건륭제가 미불보다 못하나, 동기창보다는 낫다(米下董上)”고 평가한 표암의 글씨는 손재주를 넘어 품격과 철학을 인정받은 예술이었다.

해강 김규진의 大作 <풍죽도>를 마주하면, 먼저 바람이 느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대나무를 흔들고, 그 흔들림이 붓끝을 따라 화면 위에 펼쳐진다. 줄기는 굵고 단단하게 서 있으나, 잎은 한쪽으로 휘어져 있다. 마치 바람이 지나간 방향을 가리키듯, 먹의 번짐과 붓의 속도는 그 흐름을 생생하게 전한다대나무는 흔들리지만 꺾이지 않는다. 해강은 이 단단한 줄기를 통죽으로 그려내며, 군자의 기개를 담았다. 진한 먹은 대나무의 강직함을, 옅은 먹으로는 바람의 여운을 표현했다. 여백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지나간 자리이며 사색이 머무는 공간으로 남겼다. 그 여백 속에서 대나무의 침묵을 듣는다. <풍죽도>는 일제강점기의 격랑 속에서도 꺾이지 않으려는 문인의 자세,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정신이 담겨 있다. 해강은 붓으로 바람을 그렸고, 그 바람 속에 자신의 절개를 심었다. 이 그림은 조용히 묻는다. 당신은 어떤 바람 속에서도 곧게 설 수 있는가.

끝으로 관아재 조영석의 <매작도 대련> 과 마주했다
차가운 겨울을 밀어내듯 피어난 매화는 고결하고 단정하다그 가지에 앉은 까치떼는 희망의 전령처럼 생동감이 넘친다기나긴 기다림 끝에 찾아온 기쁨을 까치가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왼쪽의 매화 가지엔 여섯 마리 까치가, 오른쪽엔 네 마리가 소란스럽게 앉아 있다그림 속 까치의 움직임은 봄소식처럼 경쾌했고, 매화는 그 까치들과 더불어 묵묵히 피었다.
관아재의 붓은 정제되어 있다필선은 군더더기 없이 맑았고, 색감은 절제되어 더욱 밝고 고결한 느낌을 준다그래서 그의 매화는 화려하지 않지만, 품격이 있다자연을 그려서 인간의 정신을 담아낸 그림이다.

그날 성암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감상한 뒤, 관장님께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이 그림을 그린 관아재 조영석의 후손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그분의 담담한 인사 속엔 관아재 가문의 예술적 자부심이 흘러 넘쳤고, 그 순간, 성암미술관은 예술의 맥을 이어온 시간의 다리처럼 느껴졌다. 관장님의 해설은 격조 있었고, 작품 하나하나에 담긴 이야기는 오래된 서책을 넘기듯, 깊고 조용하게 마음에 스며들었다.

성암미술관의 사군자의 묵향은 아직도 내 마음에 번지고 있다.매화는 고요히 피어 있었고, 난초는 숨결처럼 가늘게 흔들렸다국화는 늦가을의 단아함으로 말을 걸었고, 대나무는 바람 없이도 곧게 서 있었다그림은 말이 없었지만, 나는 그 앞에서 오래도록 들었다선비의 절개, 문인의 고뇌, 붓끝에 맺힌 시대의 숨결이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그러나 그토록 귀한 그림들을 찾아오는 발걸음은 드물었다.
성암미술관은 대전의 예향을 품은 조용한 정원 같았다.
너무 조용해서, 아름다움이 외로워 보였다.
예술은 혼자 피어나지 않는다누군가의 눈길과 마음이 닿을 때, 비로소 살아난다.

나는 바란다.
이 고요한 공간에 더 많은 숨결이 머물기를......
묵향이 바람을 타고 퍼져, 대전의 하늘 아래 더 많은 이들의 마음에 닿기를......
그리하여, 잊혀진 아름다움이 다시 피어나기를......
매향, 난향, 국향, 그리고 댓잎에 이는 소리처럼......

북소리의 울림은 고인들을 뵈러왔다고 인사를 드리는 포퍼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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