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걸음마다 새겨지는 이야기

경산 耕山 2025. 8. 28. 13:29

걸음마다 새겨지는 이야기

스위스의  철도와 케이블카는 알프스의 거미줄 같다. 거미줄처럼  촘촘한 환승시스템은  어디서나 접근이 가능하다. 기차역과 케이블카 탑승장 사이는 최대한 가까이 설치해 짧은 시간 내에 도보로 접근 할 수 있다. 이른 아침, 뮈렌에서 메리헨까지 이동한는데 두 번의 열차와 두 번의 케이블카로 도합 4 번을 환승하며 이동했다. 시간은 한 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버스나 자가용이 필요 없는 스위스의 대중교통 시스템이 놀랍다. 10여 일 간 계속된 기차와 케이블카의 반복된 환승은 내가 평생 타야할 기차와 케이블카를 이번 스위스 여정에서 한꺼번에 체험한 듯한 기분이다.
벵엔에서 출발한 케이블카
는 거인의 손에 들린 작은 상자처럼, 거대한 산맥을 오르기 시작한다. 케이블카의 고도에 따라 달라지는 알프스의 아침은 상쾌하다. 드디어 오늘의 하이킹 출발지 멘리헨 전망대에 도착했다. 멘리헨의 정상에 내리자,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장엄함 그 자체였다. 이른 아침의 햇살이 운무를 서서히 걷어내자 거대한 산봉우리들의 윤곽이 깨끗하게 드러났다.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검푸른 아이거(Eiger) 북벽의 웅장함이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거대한 바위와 얼음으로 이루어진 그 험준한 벽은 이 세상의 모든 고난과 역경을 집약해 놓은 듯했다. 그 옆으로는 우아하면서도 날카로운 봉우리를 가진 묀히(Mönch)가 고고하게 서 있다. 그리고 그들의 뒤편에는 웅장하고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듯한 융프라우(Jungfrau)가 거대한 병풍처럼 펼쳐졌다.
이 세 봉우리는 자연 풍경을 넘어선 존재였다. 나는 그 거대한 존재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지만, 동시에 그들의 압도적인 기운에 휩싸여 벅찬 감동을 느꼈다. 알프스는 눈으로만 보는 풍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감을 깨우는 섬세한 영감이었다. 그 앞에서 나는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의 나약함,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를 동시에 깨달았다. '자연은 크기로 말하고, 인간은 역사로 말한다'는 진리를 무언으로 전하는 듯했다. 알프스 삼형제 봉우리를 감상하며 이어지는 하이킹은 세상의 소란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시간이었다. '유럽의 지붕' 융프라우를 향하는 이 길은 하늘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순례의 길로 여겨졌다.

멘리헨에서 클라이네샤이덱까지의 거리는 약 4.5km다. 이 구간은 융프라우 지역의 유명한 33번 파노라마 하이킹 코스로, 알프스의 명봉들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걷는 환상적인 트레일이다. 이 코스는 스위스 여행자들 사이에서 "천국의 길"이라 불릴 만큼 인기가 많다. 해발 2,200미터 고산 능선길은 먼저 목장의 풍경을 감상하며 걷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초록빛 양탄자를 펼쳐놓은 듯한 알프스의 초원 위를 유유히 거니는 알프스 얼룩소들은 한가로웠다. 소들의 목에 걸린 워낭 소리가 소들이 움직일 때마다 청명한 소리를 내며 알프스의 정적을 깨운다. 산 중턱을 가르는 하이킹 코스 옆으로는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작은 개울이 많았다. 차가운 물소리는 걷느라 지친 몸과 마음에 시원함을 주었다. 이 모든 풍경과 소리는 나에게 진정한 휴식과 위안을 아낌없이 안겨주었다.

알프스 초원의 8월은 한 마디로 화원이다. 길섶에는 온갖 야생화가 저마다의 빛깔로 피어 있다. 보랏빛 용담꽃은 융프라우의 순백색을 배경으로 더욱 선명하게 빛났고, 그 옆으로 피어난 엉겅퀴는 짙은 자주색으로 강렬한 존재감을 뽐낸다. 아직 꽃망울을 터뜨리기 전인 백리향은 작고 앙증맞은 모습으로 머지않아 뿜어낼 향기를 약속하는 듯했다. 하얀 백발의 노인처럼 보이는 할미꽃은 이미 절정을 지나 초원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들은 저마다 다른 색깔과 모양, 크기로 피었지만,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조화롭게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작은 생명들의 끈질긴 아름다움은  '삶의 가치는 크고 화려한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는 깨달음을 일러주었다. 그들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알프스라는 거대한 자연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도 아름다운 서사였다. 네덜란드에서 온 젊은 가족이 인상적이었다. 어린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웃으며 걷는 부부, 그리고 그들의 발걸음에 맞춰 꼬리를 흔들며 신나게 뛰어다니는 강아지. 평범한 가족의 모습이 내게는 마치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왔다. 우리나라에서는 '힘든' 것으로 여기는 하이킹을 유럽인들은 하나의 '일상'으로 즐기는 문화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연 속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며 가족과 함께하는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여행을 삶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유럽 여행 문화의 단면을 보았다. 젊은 가족의 하이킹은 내게 삶의 순수한 기쁨이었다.
하이킹을 함께한 일행 중에는 비구니 스님 두 분도 계셨다. 고요한 미소를 머금고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내딛는 그들의 모습은 속세의 번뇌를 털어내고 구도의 길을 걷는 듯했다. 융프라우의 순백은 스님의 해탈과 닮아 있었고, 푸른 초원 위를 흐르는 바람 소리는 불경 소리와 같았다. 서양의 웅장한 자연 속에서 동양의 수행자는 낯설면서도 묘한 조화였다. 종교와 문화는 달랐지만, 거대한 자연 앞에서 경외를 표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았으리라. 그들의 조용한 발걸음은 알프스의 거친 능선 위에서 평화로운 명상곡을 연주하는 듯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은 작은 존재였지만, 그 속에서 서로의 삶을 응원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
이태리에서 온 노부부의 뒷모습은 연로한 여행객의 모습 그 이상이었다. 단련된 발걸음으로 걷는 노부부의 모습에서는 세월의 흔적과 함께 깊은 사랑이 묻어났다. 여행'은 종종 인생의 여정(life's journey)에 비유된다. 험난한 산길을 함께 걷는 그들의 모습은 고난과 역경을 서로 의지하며 헤쳐나가는 부부의 삶 그 자체였다. 나는 문득, 백년해로(百年偕老)'라는 동양적인 의미를 서양인 노부부의 뒷모습에서 발견했다. '()'의 가치가 부부라는 가장 작은 단위의 공동체에서 실현되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알프스의 광활한 자연 속에서 노부부의 발걸음은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가치인 사랑과 동반의 의미를 되새겨주었다.
노부부의 뒷모습에 우리 부부의 모습을 투영해 보았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풍경을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함께 걸을 수 있었음에 깊이 감사했다. 눈부신 빙하의 풍경이 펼쳐진 길 위에서 나란히 내딛는 발걸음은 오늘 따라 의미가 달랐다. 한 걸음마다 우리의 이야기가 새겨지고 숨가쁜 순간에도 서로를 향한 온기가 전해졌다. 수 많은 사람들이 스쳐갔지만 우리 두 사람만의 건강한 발걸음만이 고요한 알프스에 작은 울림을 남겼다. 이 길의 끝에서 나이테처럼 깊어질 오늘을 마음에 새기며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충만함을 느꼈다.

나는 묵묵히 길을 걸으며, 알프스가 들려주는 다양한 서사를 온몸으로 느꼈다. 험준한 산맥의 거친 숨소리, 야생화의 속삭임, 그리고 길 위에서 마주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모두 이 위대한 자연의 일부였다. 알프스 하이킹은 저마다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걷고 있지만, 결국 같은 길 위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알프스의 길은 각자의 삶의 여정을 성찰하게 하는 거대한 인문학 교실이었다. 나는 아름다운 자연을 여행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삶의 의미와 시간의 흐름을 다시금 생각해보는 귀한 경험을 했다. 인생의 의미는 삶의 길 그 자체에 있었다.

알프스 산악열차
벵엔에서 멘리헨 정상까지 케이블카
해발 2200m 멘리헨 정상에서 왼쪽으로 융프라우가 보인다.
근심 없는 알프스 얼룩소 워낭소리 정겹다.
알프스 야생화
길 위에서 만난 네덜란드에서 온 젊은 가족
비구 스님들과 함께 하이킹
알프스 삼형제, 왼쪽부터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가 나란히 보인다.
호수에 비친 융프라우, 클라이네샤이덱에서 하이킹을 끝내고 융프라우요흐로 가는 산악열차에 오른다.



'해외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금 뿔의 서사시  (5) 2025.08.30
시간이 얼어붙은 하늘의 정원  (7) 2025.08.29
천상의 식탁  (6) 2025.08.27
소리와 그림의 여정  (8) 2025.08.25
스위스의 낭만, 기차여행  (4) 2025.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