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기행

[겸재 답사기행] 겸재 전시회를 다녀와서

경산 耕山 2025. 5. 6. 13:04

자연과 예술의 교향곡

온 세상을 연둣빛으로 물들이는 오월
조선의 畵聖,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 眞景山水畵를 만나는 날
호암미술관을 찾았다. 미술관에 들어서기 전  먼저 희원(熙園)을 거닐었다. 희원은 그 자체로도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희원의 초록은 부드럽게 제때에 맞춘 봄의 수묵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이름처럼, 오월의 희원은 생명의 환희로 가득했다. 이제 막 피어나는 작약과 모란의 탐스러운 꽃망울은 수줍은 듯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잘 가꿔진 소나무들은 저마다의 기품을 뽐내며 서 있고, 고즈넉한 정자와 연못이 어우러진 풍경은 창덕궁 후원 같은 느낌을 주었다. 전통과 자연이 어우러진 정원 풍경은 마음을 차분하게 했고, 자연 속에서 마음을 정갈히 하고 예술을 마주할 준비를 하는 의식과도 같았다.  겸재의 전시회는 그런 자연의 연장선으로 이어졌다. 마치 희원에서 비단 장막을 걷고, 그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두운 조명을 따라 전시 공간으로 들어섰다. 드디어 오래 전부터 소망했던 국보 그림 두 점이 보였다. 겸재의 필생의 역작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금강전도(金剛全圖)>가 엷은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작은 감정의 일렁임은 있었지만 여유를 가졌다.   그림 앞에는 이미 많은 관람객들이 줄지어 저마다의 감상에 젖어 있었다.  그림 주변이 복잡했지만 보이지 않는 질서는 있었다. 초심자의 마음으로 감상하기 위해 머리 속에 이미 주입된 배경지식을 비우고 그림 앞에 섰다.
나는 겸재의 작품들을 여유롭게 감상하려고 비교적 한가한 5 8일 평일에 예약을 했다.  그리고  이 그림을 대면하기 전에 그림의 소재지 인왕산 '진경산수화길'도 걸었다. 그런데 인왕제색도는 미국 전시를 위해 56일에 철거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국보 216! 인왕제색도를 만나고 싶은 소망은 간절했다. 책자에서 수없이 펼쳐보았던 조그만 크기의 인왕제색도가 아니라 본래 크기의 원본 그림을 영접하는 순간을 경험하고 싶었다.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절호의 기회였다. 즉시 예약을 변경했다. 휴일의 복잡한 관람인파가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5 5일에 예약이 가능했다.   
인왕산에 퍼붓던 비가 개인 직후의 장면을 그린 인왕제색도!
그림 속 먹빛은 산의 형세만큼이나 굳세었다. 짙은 먹으로 그려진 바위 봉우리와 흰 운무가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운무는 산뜻함을 더한다. 검은 얼굴의 치마바위는 강인함을, 운무 속에서 나타나는 나무와 숲은 건강함을 보여주는 듯했다. 더욱이 세 줄기 폭포는 자연의 힘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보여주는 순간의 풍경이었다. 폭포의 물소리가 귓가를 두드리는 듯했고, 그 하얀 물줄기에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먹의 농담만으로 어쩌면 저리도 힘차고 굳건한 바위의 질감을 표현할 수 있을까. 묵직하면서도 장엄한 기운이 그림 밖으로 흘러나와 비 갠 뒤의 상쾌한 공기와 산의 신선한 냄새 그리고 골짜기를 채운 운무의 기운까지 느껴지는 듯한 감정몰입이었다.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는 말을 되새겨 보았다. 그림 속의 집에서는 詩畫相看之友(시와 그림을 서로 교류했던 벗) 사천 이병연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 겸재는 인왕산의 어두운 구름이 걷히듯이 사천의 쾌유를 기원하는 마음을 그림에 담았다. 겸재와 사천의 우정어린 서사가 담겨 있어 감동을 더하는 그림이다. 겸재는 비 개인 인왕산의 모습을 통해서 자연의 정수와 인간의 감정을 동시에 담아낸 것이다. 추사가 "압록강 동쪽으로 이만한 그림이 없다"고 극찬했던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금강전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금강산의 겨울 모습을 태극 모양으로 형상화한 대작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독특한 구도 안에 금강산 일만 이천 봉우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암봉(巖峰)들은 강렬한 수직준법으로, 둥글고 부드러운 토산(土山)들은 미점준법으로 그려내 음양의 조화를 이루었다. 실경(實景)을 바탕으로 했으되, 겸재의 마음속에서 재구성된 이상적인 금강산의 모습이다. 겸재는 금강산의 일만이천 봉우리와 계곡, 그리고 숲을 세밀하게 묘사하며 그 장엄함을 표현했다. 특히 만폭동과 비로봉의 묘사는 마치 그곳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 나의 시선을 붙잡았다. 만폭동은 금강산의 배꼽이다. 물이 하얗게 부서지고, 너력바위에는 겸재 일행이 이를 구경하고 있다. 만폭동萬瀑洞은 수많은 물줄기가 바위를 타고 쏟아져 내리는 장관을 역동적인 필치로 담아냈다. 그림인데도 불구하고 귀에서는 우렁찬 폭포 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눈앞에는 하얀 포말이 시원하게 부서지는 듯했다. 비로봉의 능선은 한 획 한 획이 정확하면서도 유연하다.  비로봉毗盧峰금강산의 정수리다. 그 모양은 평범하지만 웅장하고 숭고한 자태는 몇 번의 붓질만으로도 보는 이를 압도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겸재의 산은 실제보다 더 진짜같다.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을 그린 진경산수다. 진경산수는 실경산수 바탕에 마음이 더해진 그림이다. 겸재의 금강산수는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 느끼는 그대로'를 담아낸 것이다.  자연을 베끼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진경산수가 바로 금강전도다. 금강산에 깃든 기운과 생명력까지 붓 끝으로 길어 올렸다. 자연이 주는 장엄함, 생명의 약동, 그리고 그 안에 깃든 우주의 질서 같은 깊은 울림이 느껴졌다.

일만이천봉 개골산을
어느 누가 참모습 그릴 생각이나 했으랴.
많은 향기는 동쪽 바다 너머에 떠돌고
쌓인 기운은 온 누리에 크게 서렸네.
몇몇 송이 연꽃은 흰 빛깔 드날리고
반쯤 되는 송백 숲에는 절집이 숨어있다.
설령 지금 당장 걸어서 두루 다닌다 한들
머리맡에 두고 아낌없이 보는 것에 비기랴.

겸재는 이처럼 그림과 화제시를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욱 풍부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겸재의 금강전도가 있어서 금강산을 여행하지 않고도 안방에 누워 그림을 펼쳐놓고 와유(臥遊)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시각적인 즐거움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까지도 움직인다.

겸재는 폭포 그림을 많이 남겼다. 박연폭포(朴淵瀑布)그 중에서도  힘차고 장쾌하다. 나는 박연폭포 앞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 거침없이 쏟아지는 물줄기는 자연의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는 동시에, 보는 이의 마음까지 시원하게 씻어주는 듯하다. 폭포의 물소리와 산의 정적함, 그리고 바람마저도 느낄 수 있었다. 박연 폭포는 자연의 절경만을 그린 것이 아니었다. 물이 내리는 소리, 바위에 부딪혀 터지는 포말, 그 아래 선 사람들의 작음을 함께 담고 있다. 물이 바위를 부수지 못하면서도 끝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인생 역시 그리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폭포의 끊임없는 흐름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통해 인생의 무상함과 영원성을 동시에 표현한 것은 아닐까.
폭포는 예로부터 선비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소재였다. 쉬지 않고 흘러내리면서도 마르지 않는 그 모습에서 영원한 생명력을 보았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거침없이 떨어지는 기상에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기개를 읽기도 했다. 또한, 세차게 떨어져 바위를 뚫는 물방울에서 꾸준한 노력의 중요성을 배우기도 했다. 겸재의 박연폭포는 이러한 인문학적 가치까지 담아내며, 깊은 사유의 시간을 선사한다.

겸재의 생애를 돌아보면, 그는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자신의 예술 세계를 완성해 나갔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명산대천을 유람하며 다양한 풍경을 직접 보고 느꼈고, 그 경험은 그의 그림에 고스란히 녹여냈다. 특히 금강산과 인왕산, 그리고 한강 주변의 풍경은 그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였다. 당대 문인들과 교류하며 시와 그림을 함께 나눈 그의 그림에는 그러한 교감의 흔적이 진하게 배어 있다. 겸재의 그림은 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고 오감을 자극하며, 마음 깊은 곳까지 울림을 준다. 겸재는 그의 그림을 통해 시대와 소통한 선비였다. 그의 山水는 단순한 풍경을 넘어 존재에 대한 물음이었다.
호암미술관에서의 시간은 짧았지만, 그 여운은 오래도록 남았다. 인왕산의 굳건함, 금강산의 신비로움, 박연폭포의 장쾌함 속에서 나는 자연의 위대함과 예술의 힘을 동시에 배웠다. 그리고 겸재의 산수를 통해 나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겸재의 그림은 자연과 예술이 하나가 되는 교향곡이었다.

그림으로 산수를 노래한 겸재 정선!!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인간의 이야기를 담아낸 화가
자연을 사랑하고,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한 노화가의 붓질이 메마른 현대인의 가슴에 오월의 단비처럼 촉촉하게 스몄으면 좋겠다.

전시관 내부 모습
겸재 <인왕제색도> 79.2*138.2cm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제216호

큰비 내리다 그친
인왕의 윤 오월
검은 바위 사이로
하얀 물줄기 소리

물안개 피어올라
골골이 솔숲 가리고
비에 씻긴 기와집
사천이 마지막 붓을 놓았다 

겸재의 간절한 붓질에도
그는 짙은 먹빛으로
인왕산 바위가 되었다

먹으로 주고받던 시와 그림
붓으로 맺은 60년 우정
잡을 수가 없구나  /명작기행  인왕제색도

겸재 <금강전도> 1734년 130CmX94Cm 국보217호

개골산 일만이천 봉
그 맑고 정갈한 산세
한 폭의 진경산수로 살아 있다

서릿발 같은 바위산
부드러운 솔숲 土山
조화로운 대립 사이로
바람은 춤추고 폭포는 노래한다

천상과 지상의 기운이 만나
끝없는 태극의 순환 속에
개골산이 생동한다

두 발로 걸어 두루 돌아본들
머리맡에 두고 보는 이 그림만 하겠는가  /명작기행  금강전도

겸재<박연폭포>119.4*51.9cm 보물 제1388호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았다
느끼는 대로 그렸다

풍경만 그리지 않았다
소리도 그렸다

아찔한 암벽
천둥 같은 물줄기

겸재의 진경산수
음양이 조화롭다    /명작기행  인왕제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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