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산골 봉평 오지마을이 효석의 이름으로 해마다 변모하고 있다.
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있어 봉평은 행복해 보였다.
효석은 갔지만 그가 남긴 [메밀꽃 필 무렵]은 경향각지의 사람들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문학의 힘은 이런 것인가?

가산공원, 이효석문학관, 효석생가, 근대문학체험관, 달빛언덕, 봉평시장 등 다양한 모습으로 효석을 만날 수 있다.



이효석은 실제로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 피는 강원도 평창군 봉평에서 태어났다.

그는 강원도 오지에서 서울로 유학하여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을 수석으로 입학한 수재였다.
그의 저작 활동은 100편에 가까운 단편에 집중되어 있으나, 경성제일고보 재학 중에 발표한 시를 비롯하여 장편소설, 수필, 평론, 희곡 · 시나리오, 번역 등 다방면에서 작품을 발표하였다.
단편집 기준으로 그의 대표작을 추리면, <露領近海>, <해바라기>, <이효석단편집> 등이 있다.
장편으로는 『화분(花粉)』(1939년 작), 『벽공무한(碧空無限)』(1941년 작)이 있다. 이 중 『화분』은 1972년 하길종 감독이 영화화하였다. 110편이 넘는 수필을 발표하여 당대에는 수필가로서도 명망이 높았다.
'美人薄命 才士多病'이란 말처럼 그는 타고난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세상과 아쉬운 이별을 하고 말았다.


효석은 1달에 7~8편의 영화를 감상한 영화광이라 전하며 직접 희곡과 시나리오를 창작하기도 하였다.
1930년에는 ‘조선씨나리오·라이터협회’를 결성하였고 당시 조선 영화계에 활력을 주었다고 평가 받는다.




1932년 처가가 있는 함경북도 경성군으로 내려가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취직해 경제적으로 안정된 시기였다.
그의 작품세계는 초기의 경향문학적 요소를 탈피하고 그의 진면목이라고 할 수 있는 순수문학을 추구하게 된다.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구인회' 동인이었지만 지리적 여건상 활발한 활동은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효석은 1934년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평양으로 이사하였다.

한국의 토속적 색채를 강하게 그린 메밀꽃 필 무렵과는 달리 서구적인 문화를 매우 즐겼다고 한다.
빵과 버터, 커피 등을 즐겨먹고 쇼팽과 모차르트의 피아노곡 연주, 벽돌집, 서양영화 감상 등을 즐겨했다고 한다.
외모조차 훤칠한 모던보이였다.
경제적으로 여유를 갖추게 된 이효석은 1936년에는 걸작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는 등 전성기를 맞았다.
어린 시절의 고향에서의 추억을 담은 향수의 문학들이 많았다.

평양시절의 행복은 길지 않았다.
안정된 직장이었던 숭실대학이 1938년 폐교되고, 연이어 1940년 차남과 아내를 병으로 떠나 보냈다.


봉평시장 어느 골목에 그려진 [메밀꽃 필 무렵] 장면들이 정겹다.
문학과 그림이 있는 골목 풍경, 감성이 풍성해지는 공간이다.





고단한 장돌뱅이의 삶에도 사랑의 추억이 있어 이렇게 낭만적일 수가 있다.
메밀꽃, 달빛, 개울가, 물레방아 그리고 사랑......

젊은 시절 어느 처녀와 잊지 못할 인연을 맺은 밤도 메밀꽃이 가득 피어난 달밤이었다.



작품의 시작과 마지막에 왼손잡이라는 상징과 암시를 적절하게 사용해 혈육의 여운을 수채화처럼 드러낸다.

그는 '언어의 연금술사', '소설을 배반한 소설가'라는 평가를 바는다.
소설을 시로 썼다는 말인지, 시로 소설을 썼다는 얘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