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담사로 가는 가을길이 많이 좋아졌다.
여름까지만해도 이 길은 좁고 요철이 심하여 온몸으로 객창감을 즐겨야 했다.

만해선사도 이 길을 걸어 백담사로 들어가셨겠다.
단풍이 들기도 전에 떨어진 잎새를 밟으며 님이 떠난 단풍나무숲길을 걷다.


설악산 백담사는 시대가 주는 아픔에 고민하던 명사들이 찾아와 힐링을 했던 곳이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과 삼연(三淵) 김창흡(金昌鑫) 대학자와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머물렀던 곳이다.
근래에는 1988년 일해 전두환 대통령 부부도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했다.(승려 만해와 대통령 일해의 평가는?)
자신의 이상과 현실과의 거리를 두고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성찰할 시간이 필요했다.

오늘은 만해기념관을 개방했다.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

백담사는 만해에게 있어서는 제2의 고향이었다.
1896년 동학혁명에 가담하다 설악산 오세암에서 은신하던 중 불경공부를 했다.
1905년(26세) 결혼한 몸으로 백담사로 출가하여 중이 되고
1910년 [조선불교유신론]을 1925년 [임의 침묵]을 이곳 백담사에서 탈고했다.




만해선사는 조선불교의 현실안주와 은둔주의(산속의 불교)를 비판했다.
‘승려에서 대중에로’, ‘산간에서 길가로’ 라는 불교 확산 실천운동을 벌였다.
일제의 <조선사찰령>에 맞서 불교의 통일을 역설하였다.
염불당(念佛堂)의 폐지와 불교의식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대중불교 운동을 하면서 승려는 술을 마셔도 된다고 했다.
또한 승려는 결혼해도 된다고 했다. 신라 원효대사가 다시 환생한 것이다.
'인간이 가장 큰 죄를 짓고 불효한 것은 결혼하여 후사(後嗣)를 두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에도 해로울 뿐 아니라 국가에도 해롭다.
승려의 결혼을 금지하는 것은 소승(小乘)들의 일부 승려가 분별없는
애욕(愛慾)에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하려 계율을 만든 것뿐이다.
부처님의 계율에 결혼을 금함은 진실로 방편(方便)에 불과한 것이며 불교의 최종 진리가 아니다.'


선과 교는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다. 왜냐하면, 선이란 불교의 마음이며, 교란 불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양자의 이론적 합일과 실천이 불교 진흥의 관건이라고 주장하였다.

만해는 월남 이상재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대해 소상히 설명하고 참여를 권유하였다.
그러나 이상재는 "잘못하면 폭동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다칠 것이니 독립운동을 할 것이 아니라 일본총독부에 <독립청원서>를 내자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만해는 처음부터 완강하게 '독립선언'을 주장하였다.
"조선 독립이라고 하는 것은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운동이요. 침략주의에 대한 약소 민족의 해방 투쟁인데 청원에 의한 타의의 독립운동이 웬 말이냐. 민족 스스로의 결사적인 힘으로 나가지 않으면 독립은 불가능한 것이다"라고
반박하여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그 이후 월남과 영원히 결별해 버리고 말았다.
만해 선생이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과 나라의 장래를 의논한 일이 있다.
이때 도산은 우리가 독립을 하면, 나라의 정권은 서북(西北) 사람들이 맡아야 하며, 기호(畿湖) 사람들에게 맡길 수는 없다고 하였다. 만해 선생이 그 이유를 물으니, 도산 선생은 기호 사람들이 오백년 동안 정권을 잡고 일을 잘못했으니 그 죄가 크며, 서북 사람들은 오백년 동안 박대(薄待)를 받아왔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한다. 그후부터 만해 선생은 도산 선생과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공약 삼장
▪ 금일(今日) 오인(吾人)의 차거(此擧)는 정의(正義)·인도(人道)·생존(生存)·존영(尊榮)을 위하는 민족적(民族的) 요구(要求)니 오즉 자유적(自由的) 정신(精神)을 발휘(發揮)할 것이오 결코 배타적(排他的) 감정(感情)으로 일주(逸走)하지 말라.
▪ 최후의 일인(一人)까지 최후의 일각(一刻)까지 민족(民族)의 정당한 의사(意思)를 쾌히 발표하라.
▪ 일체(一切)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吾人)의 주장(主張)과 태도(態度)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광명정대(光明正大)하게 하라.
민족 대표들은 모두 감방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이렇게 갇혀 있다가 그대로 죽음을 당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평생을 감옥 속에서 살게 되지나 않을까?
그들이 속으로 이러한 불안을 안고 절망에 빠져있을 때, 극형에 처한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선생은 태연자약하였으나 이런 얘기를 전해들은 몇몇 인사들은 대성통곡을 하였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선생은 격분하여 감방 안에 있는 똥통을 뒤엎어 그들에게 뿌리고,
"이 비겁한 인간들아, 울기는 왜 우느냐. 나라 잃고 죽는 것이 무엇이 슬프냐? 이것이 소위 독립 선언서에 서명을 했다는 민족 대표의 모습이냐? 그 따위 추태를 부리려거든 당장에 취소해 버려라! "라고 호통을 치니,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지은 것은 다 아는 바와 같다. 그러나 그는 그 뒤 변절하여 중추원(中樞院) 참의(參議)라는 관직을 받고 있었다. 선생은 이것이 못 마땅하여 마음으로 이미 절교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육당이 길에서 선생을 만났다. 선생은 그를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빨리 걸어갔으나 육당이 따라와 앞을 막아서며 먼저 인사를 청했다.
"만해 선생, 오래간만입니다." 그러자 선생이 이렇게 물었다.
"당신 누구시오? "
"나 육당 아닙니까? " 선생은 또 한번 물었다.
"육당이 누구시오? "
"최남선입니다. 잊으셨십니까? " 그러자 선생은 외면하면서
"내가 아는 최남선은 벌써 죽어서 장송(葬送)했소." 라고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만해의 문학은 불교사상과 독립사상, 문학사상이 삼위일체를 이룬다.
이별은 만남에 이르는 방법적인 원리이며 사랑을 완성하는 과정일 뿐이다.
님을 이별한 시대는 바로 침묵의 시대, 상실의 시대이며
언젠가 맞이하게 되는 만남의 시간은 광복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기다림의 시 또는 희망의 시로 파악할 수 있다.
그의 시정신과 미학은 어려운 시대일수록 풍란화 매운 향내로서 더욱 그 빛과 향기를 더해갈 것이다.
독자여,
나는 시인으로 여러분의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 합니다.
여러분이 나의 시를 읽을 때에 나를 슬퍼하고 스스로 슬퍼할 줄을 압니다.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때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늦은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이는 것과 같을런지 모르겠습니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악산의 무거운 그림자는 엷어갑니다.
새벽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집니다. 「님의 침묵」 서시, [독자에게]

선생은 처음부터 "나는 조선 사람이다. 왜놈이 통치하는 호적에 내 이름을 올릴 수 없다."고 하며,
시집 《님의 침묵》에도 '나는 민적이 없어요'라는 구절이 있듯이 평생을 호적 없이 지냈다.
그래서 선생이 받는 곤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신변 보호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은 물론, 모든 배급 제도(쌀 고무신 등)에서도 제외되었다.
그보다도 큰 문제는 선생이 귀여워하던 외딸 영숙이가 학교를 다닐 수 없었던 점이었다.
아버지가 호적이 없으니 자식 또한 호적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선생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일본놈의 백성이 되기는 죽어도 싫다.
왜놈의 학교에도 절대 보내지 않겠다."하고는 집에서 손수 어린 딸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춘원 이광수는 불교 소설을 쓰거나 소설에 불교에 관한 것을 인용할 때에는 곧잘 선생을 찾곤했다.
그리하여 그 교리(敎理)의 옳고 그름을 물었다. 이같이 선생은 춘원과 서로 문학을 논하며 정신적인 교류를 해왔다.
춘원은 창씨개명을 한 뒤의 어느날 심우장으로 선생을 방문했다.
집 뜰에 들어서는 춘원을 본 선생은 춘원이 이미 창씨개명한 것을 알고 있던 바라,
찾아온 춘원이 인사도 하기 전에 그를 내다보고 노발대발하여
"네 이놈, 보기 싫다. 다시는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말아라." 하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춘원은 청천벽력 같은 이 말에 집에 들어가기는커녕 변명할 여지도 없어 무색한 낯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중국에서 독립 운동을 하다가 왜적에 검거되어 그후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애국지사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선생이 별세하고 말았다.
만해 선생은 자진하여 유해를 인수해서 심우장의 자기 방에다 모셔다 놓고 오일장을 지냈다. 장례 때에는 사상가를 중심으로 한 많은 명사가 조의를 표하기 위하여 왔으나 꼭 오리라고 믿었던 모모 인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누가 그 까닭을 물으니 선생은 "그 삶들이 사람 볼 줄 아는가! "라고 말했다.
"우리 민족 지도자의 유일무이한 위인인 일송 선생의 영결은 민족의 대불행이라, 2천2백만 겨레를 잃는 것처럼 애석한 일이다. 국내 해외를 통하여 이런 인물이 없다. 유사지추(有事之秋:독립의 뜻)를 당하여 나라를 수습할 인물이 다시 없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니 비통하다."
독립 후 건국의 대업을 생각하고 일송의 죽음을 애통해했던 것이다.

백담계곡을 흐르는 차가운 물이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만해의 심경'과도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