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연정에서 읽는 물소리
험한 바위 칼날 위에
어찌 터를 잡았는가
연둣빛 공기 사이로
정자 홀로 의연하구나
온몸으로 받아 적는 계곡의 메아리
청량한 자연의 절창(絶唱)
난간에 기대어 듣는 머언 풍류
마른 눈가에 은은히 젖어 든다


위 편액 글씨는 구한말의 대유학자이자 순국지사인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의 필적이다. 낙관으로 쓴 단하거사(丹霞居士)는 선생이 즐겨쓴 또다른 호이다. '붉은 노을'을 뜻하는 이 호는 그의 은거 철학과 선비로서의 지조를 보여준다. 정자의 의미를 살려서 군더더기 없는 필체로 잘 형상화했다. 지금은 바닥에 떨어져 파손된 채, 정자 바닥에 누워 있다.

꽃 수풀 우거진 화림동으로 들어서니 곳곳이 보배롭고,
늘어선 대나무 숲 대면하는 곳마다 참으로 좋은 시절이로다.
나의 성정과 마음은 속세의 소란함과 완전히 떨어져 있고,
이 이름난 절경은 깊은 산수 속에 고이 감추어져 있네.
잔을 들어 만물과 더불어 맺힌 것을 풀고자 청하고,
버들 그림자 아래서 무이구곡의 시구를 외노라.
맑은 바람을 읊조리는 이 정자의 주인으로서 은진 송병순이 쓰다.
(송병순(宋秉珣 1839-1912) 선생은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자결하신 문충공 송병선(宋秉璇 ) 선생의 동생이다.)

화림동의 풍류, 거연정
4월, 꽃으로 숲을 이룬다는 함양군 안의면의 화림동 계곡을 따라 달리다 보면 바위섬 중앙에 화관처럼 얹힌 정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거연정(居然亭)이다. ‘자연 속에 머물러 산다’는 이곳은 바위와 물줄기가 어우러진 천혜의 풍류 공간이다. 거연(居然)이란 이름처럼, 거연정은 산수와 하나 되려 했던 옛 문인들의 풍류 정신이 깃든 곳이다. 흐르는 물소리에 잠기다 보면, ‘거연’이라는 말이 단순한 정자 이름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임을 깨닫게 된다. 바위섬 정자로 이어진 길은 무지개 다리다. 무지개 다리를 건너면 세속과 거리를 둔 또하나의 세상에 들어온 느낌이다.
거연정은 광해군 시절 혼란을 피해 고향 함양으로 내려온 화림재 전시서(全時叙) 선생이 세운 정자다. 선생은 화림동 계곡의 수려한 암반 위에 정자를 짓고 계절의 변화와 자연의 섭리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 순조 때 대사헌을 지낸 고산 임헌회는「거연정기」에서 “영남의 명승 가운데 화림동이 으뜸이며, 그 가운데 거연정이 가장 빼어나다”라며 극찬했다. 편액 글씨는 구한말의 순국지사인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의 필적이다. 낙관으로 쓴 단하거사(丹霞居士)는 '붉은 노을'이라는 의미로, 그의 은거 철학과 선비로서의 지조를 보여준다. 居然의 의미를 살려 모난 데가 없고 군더더기 없는 필체로 잘 형상화했다. 편액은 무슨 일인지 파손된 채, 정자 바닥에 누워 있었다.
정자에 올라 앉자, 시야보다 먼저 마음이 열렸다. 흘러가는 것은 물인데, 이상하게도 시간 쪽이 더 많이 움직이는 듯했다. 젊은 날에는 속도가 방향을 대신했지만, 이제는 방향이 속도를 늦춘다. 나이들어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몸이 아니라 흥일지 모른다. 좋은 날을 알아보는 감각만은 오히려 또렷해져, 이 자리를 다시 찾게 된다.
정자 내부에는 을사늑약 때 순절한 연재 송병선과 그의 동생 심석 송병순의 글씨와 시판이 걸려 있다. 격랑의 시대를 건너온 한 선비가, 끝내 놓지 않았던 것은 나라의 도리와 더불어 스스로를 지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두 분의 발자취만 남았지만 그들이 앉았을 자리의 공기는 느낄 수 있었다. 연재 선생은 ‘말을 줄이면 바람이 대신 머물고, 비워 둔 자리에는 물이 스스로 깊어진다.’고 했다. 자연은 늘 같은 방식으로 가르치지만, 사람은 같은 자리에 여러 번 앉아야 비로소 알아듣는다.
무지개 다리에서 뒤돌아보니, 정자는 여전한데 나는 다리 건너갈 때의 내가 아니었다. 무엇을 얻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무엇을 덜어냈는지는 분명했다. 말을 조금 덜어내고, 서두름을 조금 내려놓고, 굳이 붙잡지 않아도 되는 인연들을 흐르는 물에 띄워 보냈다. 그렇게 몇 번이고 비워지다 보면, 언젠가는 이 물소리처럼 가벼워질 수 있으리라.
거연정에서 시작해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으로 이어지는 6km의 선비길은 영남 선비들의 풍류를 체험하는 길이다. 여울지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걷다 보면, 바위의 굴곡을 존중해 세워진 정자처럼 삶의 굴곡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비로소 진정한 ‘거연’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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