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기행

세상이 멎은 순간

경산 耕山 2025. 12. 26. 12:12

세상이 멎은 순간
     - 하예즈의 <키스>

 

뜨거운 입맞춤
세상이 멎은 듯
오직 사랑의 불꽃만이
입술의 시간을 태운다

망토 끝자락에 스민 바람
어깨 위에 맺힌 간절한 눈물
사랑은 이별 속에 더욱 뜨겁고
키스는 영원 속에 더욱 깊어라

이 순간
그대의 눈빛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그대의 품 안에서 끝없이 자유로워
사랑은 이별이 두렵지 않다

프란치스코하예즈 [키스] 1859년 110*88cm 밀라노 브레라미술관

세상이 멎은 순간

프란치스코 하예즈의 <키스>는 연인의 입맞춤을 그린 낭만적 장면을 넘어, 사랑과 조국을 향한 헌신을 동시에 담아낸 이탈리아 낭만주의의 대표작이다. 화면 속 남녀는 뜨겁게 입맞추고 있지만, 그들의 몸짓은 단순한 애정의 표현을 넘어선다. 남성은 망토를 움켜쥔 채 계단을 오르려는 자세를 취하며, 떠나야 할 운명을 받아들이는 결연한 태도를 보여준다. 여인은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간절히 이별을 붙잡으려 하지만, 이미 시간은 그들을 갈라놓고 있다. 이 장면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마지막 인사, 장엄한 작별의 순간이다.

이 작품이 제작된 1859년은 이탈리아가 독립과 통일을 향해 치열하게 몸부림치던 시기였다.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라 불린 민족운동은 개인의 삶을 넘어선 시대적 과제였고, 하예즈는 이를 예술 속에 담아냈다. <키스>는 단순히 두 연인의 사랑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 개인의 열정과 국가적 헌신이 교차하는 순간을 포착한 역사적 기록이다. 남자의 발걸음은 자유를 향한 길을 상징하고, 여자의 눈물은 민족의 기억을 대변한다. 사랑과 희생이 하나의 몸짓 속에 겹쳐져 있는 것이다하예즈의 <키스>는 그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명화로, 지금도 이탈리아인들의 마음속에 사랑과 헌신의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다.

<키스>가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사랑의 열정과 이별의 고통, 그리고 조국을 위한 희생과 헌신이 교차하는 복합적 의미를 지닌다. 키스는 흔히 사랑의 절정으로 이해되지만, 하예즈의 붓끝에서 그것은 작별의 맹세이자 시대의 심장박동으로 변모한다결국 키스는 단순한 애정의 표현을 넘어, 인간이 서로에게 건네는 가장 깊은 신뢰와 약속의 행위이다. 그것은 사랑의 시작이자 끝이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묻는다. 사랑과 헌신은 과연 분리될 수 있는가, 아니면 언제나 하나의 이름으로 남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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