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기행

여백의 산

경산 耕山 2025. 12. 20. 10:57

여백의 산 
   -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청명한 아침의 시원한 바람>

 

새벽 한 줄
산 위로 바람 스치고
빛만 남는다

고요한 산색
바람의 흔적 없이
하늘이 맑다

멀리 선 산
말 없는 그림 한 점
마음이 비다

가쓰시카 호쿠사이 〈凱風快晴〉 1831년경 24.6×36.5cm 목판화 연작

조선시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금강산이 있었다면, 에도시대에는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후지산36경이 있다. 호쿠사이의 청명한 아침의 시원한 바람후지산 36연작 가운데서도 유난히 고요한 숨결을 품은 작품이다. 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산과 바람, 그리고 빛이 서로 말을 건네지 않으면서도 깊은 울림을 만들어내는 순간이 느껴진다.

후지산 36이 그려진 에도시대는 도시 문화가 활발히 성장하고 서민들의 생활 감각이 예술로 표현되던 시대였다. 사람들은 자연을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일상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받아들였다. 후지산은 그중에서도 특별한 상징이었다. 일본인의 정신적 중심이자 삶의 굴곡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영원을 상징했다. 호쿠사이는 이 산을 시대를 관통하는 마음의 형상으로 그려냈다.

이 그림은 가장 절제된 방식으로 후지산을 보여준다. 산 위로 스치는 바람과 맑은 하늘, 그리고 고요한 산색만이 화면을 채운다. 이 여백은 단순한 비어 있음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함께 숨 쉬는 공간이다. 에도시대 사람들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조화의 대상으로 바라보았고, 호쿠사이는 그 시선을 그대로 담아냈다.

이 그림이 던지는 메시지는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의 공존이다. 바람은 스쳐 지나가고, 빛은 순간적으로 머물며, 구름은 흘러가지만, 산은 그 모든 흐름을 품은 채 묵묵히 서 있다. 에도 시대의 사람들은 이 산을 보며 삶의 무상함과 동시에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평온을 느꼈다.

이 그림은 산과 바람, 빛과 여백이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며 하나의 장면을 만든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말한다. 삶의 소란 속에서도 잠시 멈춰 서서,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변하지 않는 산을 바라보라고. 그 순간 마음은 비워지고, 비워진 마음은 오히려 더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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