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를 담는 그릇
-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여인의 머리 위에서
균형을 지켜주고
품속에서는
그녀의 떨림을 받아낸다
달을 닮았다 하나
긴 밤보다도 오래
그늘과 어둠을 비추어왔다
사슴이 흘린 매화 향기
누군가
들여다보는 순간
은은히 피어나려 한다
비어 있음으로
세상을 품는다
여인의 침묵도
사슴의 향기도
그림 앞에 선
그대의 고요한 마음까지도

고요를 담는 그릇
〈여인들과 항아리〉(1960)는 잔잔한 정적이 흐르지만, 그 고요 속에는 오래된 시간의 숨결과 작가의 내면이 은근히 배어 있다. 그림 속 여인들은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어깨에 걸치고, 품에 안으며 저마다 다른 자세로 서 있다. 항아리는 여인의 하루를 지탱하는 축이자, 마음을 담는 그릇처럼 보인다. 화면 아래의 사슴은 매화를 입에 문 채 고요히 서 있는데, 이는 무병장수의 상징이자 화가가 즐겨 사용한 도상적 모티프다. 사슴의 존재는 이 장면을 현실에서 한 발 비켜선 신화적 공간으로 확장시킨다.
이 작품이 그려진 1960년은 김환기가 파리 체류(1956~1959)를 마치고 귀국한 직후의 시기다. 그는 파리에서 귀국 후에는 한국적 정서와 서구적 조형 언어를 결합하는 새로운 시도를 이어갔다. 전쟁 이후의 한국 사회는 여전히 혼란과 재건의 과정에 있었고, 예술가에게도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 혼란 속에서도 한국적 아름다움의 근원을 찾고자 했고, 그 중심에는 도자기와 여인, 사슴, 학과 같은 전통적 상징들이 있었다. 〈여인들과 항아리〉는 바로 그 탐구의 한 정점에 놓인 작품이다.
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항아리는 ‘비어 있음’의 철학을 품은 존재처럼 느껴진다. 비어 있기에 담을 수 있고, 담아내기에 다시 비워야 한다는 순환의 원리. 여인의 침묵, 사슴의 향기, 그리고 그림 앞에 선 관람자의 마음까지도 항아리는 조용히 받아들인다. “우리 항아리에서 배운 미”는 비어 있음 속에서 더 큰 세계를 품어내는 정신적 깊이였다.
〈여인들과 항아리〉는 결국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담으며 살아가는가. 고요를 담는 그릇처럼, 인간 역시 비어 있음 속에서 더 넓은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이 작품은 조용히 건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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