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의 둥지, 우록재
새장 속의 새는 옛 숲을 그리워하고
연못의 고기는 옛 웅덩이 생각하듯
남쪽 들 가장자리에 밭뙤기 일구러
질박한 생각으로 전원에 돌아왔네
초당 뜰에는 속되고 잡된 것이 없고
텅 빈 방 안에는 한가함이 넘치네
오랫동안 새장 속에 갇혀 있다가
다시 자연 속으로 돌아왔구나 - 陶淵明의 歸園田居1 중에서
동진(東晉)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은 속세의 굴레를 벗고 자연에 귀의한 해방감을 소박하게 노래했습니다. 퇴직 후 飛仙農園에 둥지를 튼 저의 삶 또한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산비탈 조그만 과수원에서 땀흘리는 ‘밭농사’와 더불어 찾아오는 벗들과 더불어 마음을 가꾸는 ‘글농사’를 함께 지으니, 비로소 나의 천성을 찾은 듯합니다. 비선농원은 세속의 명리를 떠나 자연의 순리대로 살고자 하는 저만의 작은 ‘나나랜드’가 되었습니다.
아내는 퇴직 기념으로 비선농원에 작은 초당을 선물했습니다. 비선농원의 중심, 이 초당을 벗들은 ‘우록재(友鹿齋)’라고 불러주었습니다. '고라니가 뛰노는 깨끗한 자연 속에서 벗들과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를 담았지요. 인곡 정무식 교장선생님께서 현판을 각자해주시고, 성헌 이규춘 박사의 전원 분위기를 살린 漢詩 '題友鹿齋'가 초당의 격조를 높여주었습니다. 우록재 창가에서 차 한 잔 앞에 두고 감상하는 비선농원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시경(詩境)입니다.
題友鹿齋(우록재에 부침)
靑麓小築自淸幽 푸른 산기슭 작은 초당 하나 스스로 맑고 그윽해
不關世事百念休 세상 일에 관심두지 아니하니 모든 근심이 사라지네
雨讀晴耕時望雲 비 오면 글 읽고 날 개이면 밭을 갈다 때때로 구름을 보며
高枕夢中長臥遊 높은 베개 하고 누워서 오래도록 세상을 유람하네
우록재는 비선주(秘仙酒)’가 익어가는 전통주 체험장이자, 멋과 맛을 아는 이들의 소중한 교류의 장이기도 합니다. 우록재의 술마루에 앉으면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삶의 여백이 주는 충만함이 가득합니다.
비선농원에서 빚는 전통주를 飛仙酒라 이름하였습니다. 농원의 이름에서 가져왔지만, 한 잔 마시면 신선의 경지에 오른다는 의미지요. 술을 빚는 일련의 과정은 전통문화의 연구인 동시에 계승이었습니다. 나아가서는 우리 전통주의 세계화이고, 풍류가 있는 음주문화의 바로세움이기도 했습니다. 비선주를 사랑하는 벗들이 모여 함께 술을 빚고, 술이 익어가는 소리와 향기에 귀 기울이며, 팍팍한 인간사에서 잊었던 여유를 찾았습니다. 우록재는 그렇게 사계절 내내 술 익는 향기와 사람 사는 이야기로 가득한 ‘술 익는 초당’입니다. 우록재에서 마시는 비선주는 철 따라 술의 이름을 달리하여 계절의 운치를 살렸지요.
飛仙酒
고품격 취미
세상과 소통하는 또 하나의 창문
봄에는 [이화에 월백하고]
여름에는 [청산리 벽계수야]
가을에는 [구름에 달 가듯이]
百藥之長 萬病之源
사월, 동산에 달이 뜨고 비선농원에 배꽃이 하얗게 핀 봄밤, 달빛과 어울어진 배꽃 아래에서 벗들은 상춘객이 되어 고려의 시인 이조년이 읊조렸던 “梨花에 月白하고” 분위기에 젖습니다. 갓 떠낸 비선주 한 잔에 봄의 애틋한 정서가 그대로 녹아듭니다. 다정도 병인 양 잠 못 들던 시인의 春心으로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인생과 예술을 논했습니다.
술내음
복사꽃 질무렵
초당에 술 익었네
꽃그늘에 달빛이면
취할 만하지
벗이여
술잔 사양하지 말게나
녹음이 짙어지는 여름이면 술마루는 황진이의 재기가 넘치는 풍류의 장으로 변합니다. “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한 구절로 시흥을 돋우면, 푸른 산과 시원한 계곡 물소리가 들리고 시름도 더위도 저만치 물러갑니다. 한번 흘러가면 다시 오기 어려운 세월을 아쉬워하기보다 밝은 달과도 같은 벗들과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는 호기가 넘칩니다. 청아한 비선주는 푸르른 여름의 정취를 살려주는 감로수였지요.
비선 유월
탑립동 아늑한 빈 둥지에
자리한 우록재
은행나무 그늘 아랜
바비큐가 지글지글
술마루에 둘러앉아
'청산리 벽계수야.....'
이따끔 제짝을 부르는
묏비둘기 소리만
가을, 하늘이 높아지고 철새가 남으로 향하는 맑은 밤에는 목월 시인의 시를 소환하여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의 심정으로 술잔을 채웁니다. 텅 빈 충만함 속에서 잘 익은 비선주를 나누며 각자의 삶의 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살아온 세월은! 비우고!, 살아갈 날들은! 채우자!'로 건배합니다. 나그네 같은 인생을 뒤돌아 보고 어깨동무하는 가을 밤의 술자리는 깊고 따뜻했습니다. 술보다는 술자리가 아름다운 술익는 초당이었지요.
내 벗이
내벗이 누구인고
헤어보니 셋이로다
글벗과 어울리다
술벗도 불러와서
좋은 날
먼 길 동행할 제
길벗으로 걸으리
진실로 우록재는 사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며 시와 음악, 그리고 향기로운 술이 함께하는 풍류의 공간이었습니다. 머지 않아 불어닥칠 개발의 바람 앞에 이 모든 추억을 뒤로하고 술마루를 내줘야 합니다. 제 삶의 가장 여유로운 한 시절, 술벗들의 멋과 혼이 담긴 ‘술 익는 초당’ 하나를 통째로 잃어버리는 듯한 상실감에 가슴이 저려옵니다.
우록재(友鹿齋)
산기슭에 초당 하나
작아도 즐길만 하지
마을은 저만치
어둠이 내리면
불빛마저 고요하지
아침이면
뿔 달린 후투티 마주하고
한낮에는
꾀꼬리 가족 다녀가지
익은 과일은
새들이 먼저 알고
상추 부추는
먹어도 먹어도 넘쳐나지
때때로
술내음 아는 벗들과
옛그림 펼쳐놓고
와유(臥遊)를 즐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