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선농원

飛仙 四季

경산 耕山 2025. 6. 14. 11:40

飛仙 四季


유월의 비선농원은 생명의 환희로 가득합니다
. 녹음이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고, 그 사이를 떠도는 바람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다정하게 속삭입니다. 오월의 아카시아 향기가 남긴 달콤한 여운 위로, 진한 밤꽃 향기가 내려앉으며 계절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알려줍니다. 짙푸른 녹음은 둥지처럼 아늑하게 농원을 감싸고, 그 품 안에서 온갖 열매들이 형형색색 보석처럼 익어갑니다. 우록재는 열매들의 세상입니다. 검붉은 오디, 영롱한 앵두, 수줍게 물든 보리수는 달콤한 입맛을 유혹합니다. 살구와 블루베리, 개복숭아는 다가올 칠월의 태양을 기다리며 나날이 열매가 굵어지고 빛깔을 더해갑니다.
아시다시피 과수들은 저절로 자라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관리와 애정 속에서 생장합니다. 지난주 내내 제초작업을 마치고, 이번 주는 유월의 가뭄 속에서 목이 타는 과수들에게 물을 주며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내 손으로 가꾼 비선농원의 사계는 고스란히 나의 얼굴이기에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도 없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고단한 노동만이 아니라, 자연과의 교감이며 삶의 리듬이기도 합니다. 비선농원은  인생 후반전의 일터이자 더 없는 쉼터이고  또한 시끄러운 세상 멀리하는 현실도피처로써 나는 이곳에서 자연의 순리를 따르며 농원의 모든 생명들과 공존하며 살아갑니다.

겨우내 잠들었던 땅이 기지개를 켜면, 능수매화가 봄을 먼저 알립니다. 나날이 변화하는 경이로운 풍경 속에서 나는 지난 겨울의 기다림을 끝내고 새로운 희망으로 꿈나무들을 심습니다.  벌, 나비는 홍매화, 앵도화, 살구꽃, 복숭아꽃 사이를 오가며 생명의 합창을 시작합니다. 벚꽃이 만개하면 비선농원은 고향의 봄처럼 꽃대궐입니다. 게다가 봄나물이 지천입니다. 돌나물, 냉이, 씀바귀가 입맛 돋우고, 오갈피, 엄나무 새순이 술안주가 됩니다.

새순

비선농원
복사꽃 질 무렵
엄나무 새순
꽃보다 실속 있다

연초록 눈맛에
쌉쌀한 봄맛까지
오감만족

초당 찾은 벗을 맞아
술안주로
새순이 제격이지

여름의 농원은 치열한 전장이자 저마다 성장의 무대입니다. 뙤약볕 아래 예초기를 둘러매고 잡초와의 전쟁을 치르며, 오뉴월 가뭄에 나무들의 발등에 생명수를 부어주고 또 농약으로 지켜줘야합니다. 이 계절의 귀한 손님, 후투티가 알을 낳고 꾀꼬리가 자유로이 비행을 합니다. 밤이면 오소리가 두더지를 사냥하러 나타납니다. 들고양이 등살에 꿩들이 힘들어 합니다. 농원 절반을 차지한 아로니아밭에는 고라니 가족이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먹성이 너무 좋아 어린 나무들이 몸살을 앓기도 하지만 그 또한 자연의 일부입니다. 녀석들이 어린 잎새를 밤마다 먹어치워 속상하다가도, 한편으론 '우록재'라는 이름처럼 고라니가 뛰노는 청정 자연의 주인이라는 자부심에 다시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땀 흘린 만큼 푸르게 자라나는 생명들을 보며, 정직한 노동의 가치를 온몸으로 체득합니다.

비선 8월

지금까지
물에 시달렸으니
이제는
불을 견뎌야 할 차례

땡볕 비선농원
장마가 키운 불청객
잡초와 병충해

한나절 전쟁
불가마 사우나

가을은 풍요와 나눔의 계절입니다. 다양한 과수들은 봄의 설렘과 여름의 땀방울이 알알이 맺힌 열매로 보답합니다. 대추가 붉어지고 알밤이 떨어질 때면, 대봉시가 빨갛고 비선주가 익어갈 때면, 벗들은 초대하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옵니다. 계절은 누리고 즐기는 자의 몫이니까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지요. 비선농원을 노래한 자작시 한 편 낭송하며 나누는 술 한 잔이 바로 세상의 어떤 즐거움과도 바꿀 수 없는 비선의 풍류입니다. 풍성한 결실을 함께 나누는 이 가을에 후반전 인생은 그다지 외롭지 않습니다. 내 인생에 '퇴직은 있어도 은퇴는 없다'는 다짐을 다시해 봅니다. 비선농원의 만추는 노랗게 마무리됩니다. 고목이 된 은행잎이 연출하는 계절의 절정처럼 나의 절정도 비선의 만추처럼 꽃보다 곱게 물든 단풍이기를 소망합니다.

홍시

늙은 감나무에
가을이 붉다

동그란 가지에서
까치, 디저트를 즐긴다

떫은 맛
달래며 달래며

뜨거운 강 건너온
농원 지킴이

감나무 아래 누워서
입을 벌릴 시간인데

계절도 어쩔 수 없는
내 안의 떫은 맛

겨울의 농원은 침묵과 성찰의 공간입니다. 겨울은 내게 여행의 계절이고 재충전하는 시간입니다. 농원으로부터 해방을 누리는 휴가의 시간이지요. 주인이 자리를 비워도 농원은 농원의 시계대로 돌아가니까요. 내가 돌보지 않아도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립니다. 눈 내리는 비선농원, 아름답습니다. 앙상한 겨울나무 위로 소복이 쌓인 흰 눈은 모든 것을 지우고 다시 시작하도록 도와줍니다. 눈 위에 찍힌 고라니 가족의 발자국을 따라가다가, 이놈들이 무얼 먹고 사는지 걱정이 되어, 고라니의 봄을 조급하게 기다립니다.
비선농원의 사계, 봄의 꽃향기, 여름의 녹음, 가을의 열매, 겨울의 고요까지... 귀거래사하는  세월이 그렇게 강물처럼 흘러가며 비선의 사계가 나를 가르치고 나의 삶을 풍요롭게 채웠습니다.

겨울나무

여름에 입고
겨울엔 벗는다

화려했던 시절
잎으로 감추고
꽃으로 꾸몄다

푸른 잎 둥근 열매
모두 보내고
이제는 앙상한 무채색

벌거벗은 모습
차라리 부끄럽지 않다

일터이자 쉼터 그리고 배움터인 비선농원, 봄꽃은 많았지만 가을 열매는 적었습니다. 수확은 적었지만 즐거움은 많았습니다. 꽃과 열매는 수확용이라기보다는 감상용이었습니다. 나는 과수를 재배하지 않고 정원수로 관리했습니다. 돌아보니, 비선농원에 묻혀 사는 전원생활은 계절의 순환에 동화되어 삶의 깊이를 더해가는 과정이었지요. 사계절의 변화는 곧 삶의 지혜를 깨닫게 하는 성찰의 시간이었습니다.
봄에는 얼어붙었던 땅을 뚫고 솟아나는 새싹을 보며 유한한 인생의 새로운 시작과 희망을 발견하고, 지난날의 성취와 실패를 디딤돌 삼아 새로운 삶의 씨앗을 뿌리는 설렘의 시기였습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땀 흘리며 과수를 가꾸는 여름은 인생의 후반전에 다시 한번 마주하는 열정과 몰입의 시간으로, 생명의 왕성한 에너지를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있음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풍성한 결실을 맺는 가을이 오면, 수확의 기쁨과 함께 한 해의 수고를 보상받으며 자연의 섭리에 대한 감사와 겸손을 배우고, 빨갛게 물든 대봉을 어루만지며 삶의 결실들을 차분히 관조하는 시간을 갖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멈춘 듯한 겨울의 적막 속에서는, 쉼과 비움을 통해 영혼의 안식을 얻고 다가올 봄을 준비하며 자연의 순환처럼 삶과 죽음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깨닫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이렇듯 飛仙 四季 속에서 나의 삶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스승을 통해 생명의 본질을 배우고 내면을 가꾸는 깊이 있는 여정이었습니다.

내 삶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긴 비선농원. 사십 년 전, 대전의 변두리였던 작은 텃밭은 어느 새 도심 속의 섬이 되었습니다. 나의 땀과 숨결로 가꿔온 이 푸른 둥지가 수용된다는 현실 앞에 만감이 교차합니다
이제는 부드러운 흙냄새 대신 단단한 아스팔트와 마주해야 할지 모릅니다. 새벽을 깨우던 새소리 대신 도시의 소음 속에서 잠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지난 세월과 삶의 궤적이 오롯이 새겨진 전원이었습니다. '비선농원을 떠나야 한다'는 개발의 바람은 추억마저 지워버릴 듯 아쉬움을 넘어 아픔으로 스쳐갑니다. 나는 이 정든 둥지의 마지막 사계를 눈에 담으며 서성일 뿐입니다. 이제 고라니 가족은 어디로 가야 하며, 글쓰는 농심은 어디에다 둥지를 틀어야 할까요?

비선농원의 봄의 전령사 능수매화
4월이면 엄나무순이 지천이다
제초를 하다보면 꿩의 알도 보인다
참깨밭에 둥지를 튼 생명들
비선농원 동거자
유월 블루베리
7월 살구
녹음이 우거진 비선농원
비선농원의 가을
눈 덮힌 비선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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