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실크로드] 위수(渭水)를 지나며

경산 耕山 2025. 5. 26. 23:35

위수(渭水)를 지나며

실크로드, 서역으로 가는 리무진버스에 올랐다. 길가에 주렁주렁 매달린 아카시아꽃이 이 땅에도 봄이 무르익었음을 알려준다. 서안(西安)을 출발하여 천수(天水)로 향하는 버스는 역사의 강, 위수(渭水)를 거슬러 달린다. 강줄기는 협곡을 따라 넓은 고가다리 아래로 좁고  탁한 흐름이다. 평범한 하천의 흐름과 다를 바 없지만 오래 전부터 역사책에서 만나던  위수를 대하는 마음은 설레임이었다. 나의 설레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위수는 인고의 시간을 견디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 이들의 이야기를 간직한 채 오늘도 흐르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이 강줄기를 따라 울고 웃었을 영웅, 책사들의 마음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위수 강가에서 일어났던 중국 역사의 현장을 확인하고 싶었다. 구불구불 이리저리 돌아가는 버스의 흔들림은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준비운동처럼 느껴진다.

서안공항은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의 도읍지 함양 땅에 자리했다고 가이드는 전한다. 점심을 먹으면서 여기 어디쯤에 진시황의 거대한 야망을 건축한 아방궁을 상상해 보았지만 가이드의 설명은 내가 알던 바와는 다르다.  먼저 위수 상류, 천하통일을 꿈꾸며, 척박한 농서(隴西) 땅에서 세력을 키우던 13살 나이 어린 정()을 떠올려 보았다. 그는 위수의 거친 물살을 보며 자신 앞에 놓인 수많은 난관을 이 물줄기에 합류시키며 동쪽으로 나아가리라 다짐했으리라.
버스가 위수 상류로 향할수록 야망에 찬 한 인간의 고독하고도 뜨거운 심장에 더 가까이 다가서는 듯했다. 진시황 사후에는 위수 양편에 진을 치고 항우와 유방의 건곤일척(乾坤一擲)이 벌어졌으리라. 중국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을 떠올리며, 위수의 강변에서 펼쳐졌던 치열했던 초한지를 상상해 보았다.
강물은 더욱 좁아지고, 산세는 험준해진다. 3000년 전, 강태공 여상은 위수에서 낚시를 하다가 문왕을 만났다. 낚시를 하면서 문왕을 기다렸겠다. 그가 세월을 낚았던 반계(磻溪)가 정확히 이곳 어디쯤이었을지는 모르나, 이 위수 상류의 어느 한적한 물가였으리라. "곧은 낚싯바늘을 드리우고 때를 기다린다"는 태공의 낚시는 흐르는 강물처럼 순리에 따르되 그 안에 숨겨진 거대한 변화를 읽어내려는 수행이 아니었을까? 어찌보면 세상을 등진 듯한 그의 모습에서, 오히려 세상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넓게 끌어안으려 했던 리더의 경륜과 지혜를 배운다. 도도히 흘러 황하로 합쳐지는 위수를 바라보며, 그는 세상의 이치와 인간사의 희비를 동시에 통찰한 현자가 아니었던가.
천수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삼국지의 현장, 오장원(五丈原)이 멀지 않다. 오장원은 제갈량이 위나라와 일전을 벌이다 죽음을 맞이한  땅이다. 그의 출사표에 담긴 비장한 각오와 염원이 이 위수 물줄기를 따라 흘렀던 곳이다. 기산(祁山)으로, 또 진창(陳倉)으로 향하던 그의 군사들, 그리고 그 선두에 섰을 제갈량. 주군으로 섬긴 유비의 간절한 유언과 한 황실 부흥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이 어깨를 눌렀을 것이다. 그는 이 지역 출신 강유(姜維)를 얻었을 때 큰 기쁨과 희망을 보았고, 반대로 마속(馬謖)이 군령을 어기고 가정(街亭)에서 패했을 때, 그는 읍참마속(泣斬馬謖)하며 절망했으리라.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위수를 바라보는 심정은 어떠했을까?  뜻을 이루지 못한 그의 탄식을 위수는 알고 있는지 강물 소리가 슬프다.  
당나라 시인 왕유는 위수(渭水)강가에서 서역으로 떠나는 친구를 이렇게 배웅했다.

渭城曲 / 王維 (왕유)
渭城朝雨浥輕塵 (위성조우읍경진위성 아침 비에 먼지 촉촉이 적시니
客舍青青柳色新 (객사청청류색신객사 푸른 버들 빛깔 더욱 새롭네
勸君更盡一杯酒 (권군갱진일배주그대에게 다시 한 잔 술을 권하노니
西出陽關無故人 (서출양관무고인서쪽으로 양관을 나서면 아는 이 없으리

서안에서 천수까지 위수를 거슬러 올라가는 5시간의 여정은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내게는 역사 속 인물들을 만나는 인문학 순례길이었다. 역사상 교통사고가 많았던 위수는 그래서 강물이 핏물처럼 탁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해 보았다. 화려한 역사 뒤안길에 숨겨진 영웅들의 인간적인 고뇌와 마주할 때, 역사는 더 이상 박제된 기록이 아니라 생생한 지혜로 다가온다. 차창 밖으로 진령산맥이 끝없이 이어지듯, 오늘도 쉼 없이 흘러가는 위수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것이다.

서역으로 가는 실크로드, 시안이 출발지다.
전국시대 진나라는 서역 변두리에서 동으로 진출하여 천하를 통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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