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브로

발자국의 노래

경산 耕山 2026. 3. 6. 11:58

발자국의 노래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몸을 옮기는 일이 아니다. 나는 가끔 그것을 삶을 낮은 불에 천천히 달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서두르지 않고 하루의 시간을 우려내며, 흩어진 생각들을 조용히 가라앉히는 방식 말이다. 내가 거의 매일 걷는 관평천 산책길에도 그런 시간이 흐른다.
길 위에는 늘 여러 가지 발자국 소리가 있다. 혼자 걷는 이의 고요한 걸음, 나란히 보폭을 맞춘 부부의 느린 발걸음, 커피잔을 들고 지나가는 직장인의 빠른 걸음, 강아지와 함께 여유롭게 걷는 산책의 걸음. 서로 다른 보폭들이 모여 하나의 리듬을 만든다. 나는 그것을 관평천의 작은 교향곡이라고 생각한다.
날씨는 이 길의 조용한 지휘자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알록달록한 우산들이 꽃처럼 피어나고, 볕이 좋은 날에는 챙 넓은 모자들이 길 위에 작은 그늘을 드리운다. 바람이 부는 날, 마스크 너머로 새어 나오는 따뜻한 숨결을 보면 이 길 위의 삶이 아직도 부지런히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요즈음 나는 아내와 함께 이 길을 걷는다. 처음에는 아내의 무릎 건강을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이 산책은 하루 가운데 가장 조용하고 밀도 높은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많은 말을 나누지 않는다. 그래도 이상하게 서로의 마음이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쩌면 부부에게는 긴 대화보다 나란히 걷는 시간이 더 필요한지도 모른다. 길 위의 발자국은 곧 사라진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이 보이지 않는 문장처럼 마음속에 남는다고 믿는다. 어제의 걸음 위에 오늘의 걸음이 이어지고, 오늘의 걸음 위에 또 내일의 걸음이 겹쳐진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도 조용히 이어진다.
길은 어디에나 있고, 그 길마다 저마다의 이야기가 숨 쉬고 있다.
제주의 올레길에는 바람의 냄새가 있고, 대청호 오백리길에는 잔잔한 물결의 고요가 있다. 해파랑길에는 파도가 들려주는 오래된 노래가 있고, 서울 한양도성길에는 세월의 무게가 묵직하게 내려앉아 있다. 길을 걷다 보면 자연과 사람의 시간이 한데 어우러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오래전에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오르비에토를 걸은 적이 있다. 좁은 골목 사이로 비스듬히 내려앉은 햇살이 오래된 돌벽을 천천히 쓰다듬고 있었다. 그 도시의 시간은 조금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그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의 삶도 이 골목처럼 조금 느리게 흘러가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남해의 청산도 판소리길을 걸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 위에서 파도 소리와 노랫가락이 함께 들려왔다. 그 길을 걷고 나서야 슬로시티라는 말이 단순한 표어가 아니라 하나의 삶의 방식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관평천의 산책길도, 오르비에토의 골목도, 청산도의 바닷길도 서로 다른 풍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길들이 나에게 들려준 말은 아마 하나였을 것이다.
천천히 걸어도 괜찮다는 것.
삶에서 오래 남는 행복은 대개 빠른 걸음에서보다 느린 걸음에서 찾아온다. 걷는 동안 세상의 소리는 조금 잦아들고, 대신 마음의 소리가 또렷해진다. 그래서 걷기는 몸을 위한 운동이면서 동시에 마음을 위한 여행이기도 하다
오늘도 나는 아내와 함께 관평천을 걷는다. 우리의 발자국은 잠시 뒤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 걸음 속에서 생긴 작은 기쁨들은 오래 마음에 남는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사람의 삶도 어쩌면 하나의 긴 산책이 아닐까 하고. 서두르지 않고 끝까지 걸어가는 것, 그 자체가 이미 한 편의 조용한 노래일지도 모른다.

물 맑은 가을날, 관평천의 해오라기가 한가롭다.
마음의 고향, 청산도 슬로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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