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의 풍경이 보이지 않을 때
아침 창밖은 여전히 고요하다.
나무는 바람에 조금 흔들리고, 새 한 마리가 전깃줄에 내려앉는다. 겉으로 보기에 세상은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전에 없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퇴직을 하면 인생이 조금 느려질 줄 알았다. 완행열차처럼 창밖 풍경을 천천히 바라보며 가는 길일 줄 알았다. 그런데 세상은 어느새 인공지능이라는 이름의 초고속 열차가 되어 버렸다. 목적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속도만 점점 빨라진다.
요즘은 알고리즘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듯하다. 예전 같으면 신문 귀퉁이에 실린 오늘의 운세를 읽거나 텔레비전 편성표를 뒤적였을 시간이다. 지금은 스마트폰이 먼저 움직인다. 내가 좋아하던 옛 가수의 노래를 찾아 띄워 주고, 관심 가질 만한 기사도 알아서 골라 준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다. 한때는 백과사전을 뒤적이며 두꺼운 책장을 넘겨야 했고, 도서관 서가 사이를 서성이다가 겨우 한 줄의 답을 찾곤 했다. 이제는 손가락 하나로 전 세계의 지식을 끌어올릴 수 있다. 마치 돋보기 없이도 세상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천리안을 얻은 듯하다.
열차가 너무 빨라지면 창밖의 풍경은 흐려진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지금 배우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정보를 소비하고 있는 것일까. 예전의 공부는 조금 힘든 일이었다. 스승의 등을 바라보며 삶의 태도를 배우고, 부모가 겪은 시행착오 속에서 지혜를 얻었다. 책장을 넘기다 막히는 곳이 있으면 오래 생각해야 했다. 정답을 찾지 못한 채 밤을 보내는 날도 있었다. 그 시간 속에서 마음의 근육 같은 것이 자라났다. 지식은 머리로만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삶 속에서 조금씩 체온을 얻으며 익어 가는 것이었다.
요즘은 궁금한 것이 생기면 인공지능에게 묻는다. 잠깐 사이에 요약된 답이 돌아온다. 정확하고 매끄럽다.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그 답에는 가끔 체온이 없다. 어른들이 하던 말이 생각난다. “내가 살아 보니 이렇더라.” 그 말 속에는 책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대답이 돌아오기도 한다. “AI는 그렇게 말 안 하던데요.”
세상은 분명 편리해졌다.
그러나 그 편리함 속에서 무엇인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을 둘러보면 혼란도 적지 않다. 어떤 나라는 인공지능으로 범죄를 막을 수 있다고 말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그것이 인간을 감시하는 또 하나의 눈이 될까 걱정한다. 무엇이 옳은지 쉽게 말하기 어렵다. 예전에는 경험이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세월을 견딘 나무가 단단해지듯, 오래 산 사람의 말에는 나름의 무게가 있었다. 지금은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쉽게 알기 어렵다. 딥페이크로 만든 영상이 진짜처럼 돌아다니고, 인공지능이 쓴 글이 사람의 마음을 대신하기도 한다. 세상은 점점 더 매끄러워지고 있지만 마음 한구석은 오히려 조금 서늘해진다. 가끔 그림을 보다가도 그런 생각을 한다. 인공지능이 그린 그림과 화가의 그림이 나란히 놓여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보고 감동하는 것일까. 시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이 쓴 시와 사람의 시가 함께 놓이면 우리는 어디에서 인간의 숨결을 느끼게 될까.
나는 아직 그 답을 잘 모른다. 다만 한 가지 생각은 든다. 세상이 아무리 빨라져도 사람의 마음까지 그렇게 빨라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식은 순식간에 늘어나지만 지혜는 여전히 시간을 필요로 한다. 속도는 기계가 만들어 내지만 의미는 결국 사람이 만들어 낸다.
창밖을 다시 바라본다.
나무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바람을 맞고 있다. 초고속 열차 같은 세상 속에서도 사람의 눈빛과 목소리, 그리고 스승의 따뜻한 말 한마디만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일 아침에도 열차는 계속 달릴 것이다. 다만 그 열차 안에서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열차가 아무리 빨라도 사람의 삶은 결국 서로의 마음을 천천히 이해하는 속도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이 이 정답 없는 시대를 건너가는 가장 오래된 길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