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제일의 문장가 서포!
금수저 가문 출신인데다가 총명한 재주까지 타고났다.
어린 시절 그는 병자호란으로 인해 부귀영화를 누리지는 못했다.
출세한 후에는 대쪽같은 성격으로 당쟁에 휘말려 유배를 떠나야 했다.
서포가 남해도 외딴섬 노도로 귀양을 온 사연은 무엇일까?
벽련항에서 노도까지 하루 4차례 17인승 작은 연락선이 오고간다.
10여가구가 거주하는 작은 섬에는 작은 구멍가게 하나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서포를 만나기 위해서는 발품을 팔아 한참을 올라야 한다. 문학관 근무자도 없어 적적하다.
당시 유배온 서포도 외로웠지만 지금의 문학관도 외롭기는 마찬가지다.
유배지에서 깨달음이 서포문학의 테마가 되었지.
고전의 바다를 즐길 수 있게 번역도 제본, 편의시설도 잘 해놓았는데 시간이 없어 제목만 읽고 와야하는 아쉬움.......
읽고 싶은 책만 모아서 사진으로 가져왔네.
서포의 친가는 사계 김장생의 광산김씨의 대대로 대제학을 배출한 막강한 노론의 실세였다.
외가는 과거 급제 115명을 배출한 명문 해남 윤씨 윤두수 집안이었다.
두 집안 모두 딸은 왕비로 시집을 보내고, 아들은 공주를 아내로 받아들인 외척이기도 했다.
유복자 서포의 성장과 출세 뒤에는 어머니 해남윤씨의 헌신이 있었다.
윤씨부인은 서포 형제를 직접 가르칠 수준의 家學이 있었다.
홍문관에서 책을 빌려다가 손수 필사해서 가르쳤다.
어머니는 서포에게 엄격한 스승이자 다정한 친구였다.
서포는 자식을 위해 희생하신 어머니의 삶을 일대기로 썼다. 이른바 [윤씨행장]이다.
조선시대 어머니, 율곡의 신사임당과 서포의 어머니 해남윤씨를 비교해 보았다.
서포의 문학은 효행문학이었다.
서포는 1688년 선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인현왕후 민씨의 패출사건에 연류되어
1689년(숙종 15년)다시 남해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692년 적소(謫所)에서 5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서포의 문학은 시대를 뛰어넘었다. 당대 사대부들이 귀감으로 섬기던 한자문화의 틀 깨고 나왔다.
그는 한자로 시를 쓰기보다는 한글로 소설을 썼다.(어머니가 한글로 쓰기를 권유했다고 한다.)
양반 사대부가 아니라 일반 서민들을 독자로 삼았다.
성리학만을 고집하지 않고 불교, 도교 사상도 수용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창작된 소설이 바로 [구운몽]이었다.
적극적인 여성인물들의 등장도 남다르다.
[구운몽]은 조선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에서도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저자거리에서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책을 재미있게 읽어주는 책장수가 생겨났다. 책쾌라고 불렀다.
안방에 모인 여인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여성도 있었는데 책비라고 불렀다. 이들은 청중들을 감동시켜야 했다.
책쾌와 책비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소설이 서포의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였다고 한다.
서포의 소설은 단순히 어머니만을 위로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여성들의 슬픔을 어루만져주었다.
나아가서는 동아시아 여성들에게 감동을 선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