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시대의 히어로
월평동에는 실속 있는 음악실이 하나 있다. ‘아트스테이션’이란 멋진 이름을 가졌는데 각종 악기는 물론 최신 음향시설과 촬영카메라를 세 대나 갖춘 고품질 스튜디오다. 나의 모임은 이곳에서 종종 노래하는 호사를 누린다. 가수 수준급 회원이 둘이나 있어 그들이 공연하는 음악회 또한 볼만하다.
지난 연말 아트스테이션 모임에서 젊은 친구 영웅매니아로부터 나는 귀한 선물을 받았다. 선물은 임영웅앨범과 [덕후와 철학자들]이란 책자였다. 임영웅앨범은 콘서트를 따라 전국을 투어하면서 구한 것으로 어찌보면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소장품이었다. 영웅 전도사가 전하는 열정까지 받은 느낌이었다. 앨범에 수록된 영웅의 신곡들은 낯설었다. 그의 노래는 열광하는 팬들과 더불어 날로 새로워지는데 나는 여전히 미스터트롯 시절 영웅의 노래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코로나 시절, ‘창살 없는 감옥 시대였지’.
oo방송의 미스터트롯 열기는 대단했다. 그때 나도 영웅을 많이 좋아했다. 그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재방송까지 시청할 만큼 좋아했다. 방송이 횟수를 더해갈수록 영웅의 인기와 존재감은 도를 넘었다. 폭발적인 인기였다. 최종 7명이 겨루는 결선 과정에서 그는 노래 한 곡을 남기고 2위를 달리고 있었다. 나는 그날 적잖이 마음을 졸였다. 그와 무슨 연줄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뭔지 모를 안타까움에 마음이 무거웠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문자투표에 참여하고 응원을 더했다. 그것은 내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취직할 때처럼 간절한 바람과도 같은 응원이었다.
영웅의 노래를 들으면 조용한 호숫가에서 연인들의 다정한 속삭임을 보는 듯한 그림이 그려진다. 무엇보다도 그의 노래는 야단스럽지 않아서 좋다. 억지가 없어서 좋다. 겨울 햇살처럼 듣는 이의 마음 속 깊이 파고든다. 그가 전달한 감성 짙은 가사는 내 마음 속에 촉촉하게 스며들었다. 그가 경연곡으로 불렀던 몇몇 장면은 몇 해가 지났지만 여전히 생생하다.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속의 진솔한 사랑은 눈물주머니를 자극했으며, ‘보랏빛 엽서’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새겨진 청춘까지 소환해주었고, ‘바램’은 나이 먹음에 대한 의미를 진지하게 던져주었다.
내 손에 잡은 것이 많아서
손이 아픕니다
‘손이 아픕니다.’ 대목은 가히 압권이었다. 잡은 것보다는 잡고 싶은 것이 많아서 그럴까? 그 속삭이는 듯한 미성에 간절한 제스춰 그리고 아파하는 표정까지 3박자가 하나된 순간은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아 있다. 나는 지금까지 대중가요를 이토록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귀 기울였다기보다는 나도 모르게 그만이 가진 감성에 빨려들었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영웅의 감성과 호소력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노래에 빠져야만 감성이 전달하는 섬세한 맛을 느낄 수 있듯이, 이 분야에도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가 없는 그런 경지가 있었다.
그의 노래에는 여백이 있다. 그는 무대를 꽉 채우지 않고 부른다. 그는 노래 중간에 잠시 빈 공간을 남긴다. 공연 중 고저장단, 셈여림 그리고 밀당에서 나오는 절묘한 여백은 그만이 가진 살인적인 매력이다. 그 여백 속으로 관객들은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 높은 봉우리에 올랐다가 갑자기 깊은 골짜기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그의 여백은 채우지 못한 공간이 아니라 감정을 절제하여 남겨둔 여운이다. 여백이 있기에 노래는 끝났어도 그 울림은 지속된다. 그가 만든 여백은 듣는 이가 감당해야할 파트이기도 한 것이다.
여백을 채울 줄 아는 찐팬이 많아 영웅의 노래는 호랑이 등에다 날개를 달았다. 날개 달린 호랑이 등에 타고 영웅은 태평양도 건너지 않았던가. 부르는 이와 듣는 이가 주고 받는 자연스런 소통이 공연의 완성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노래에도 음양이 있다면, 영웅의 노래는 ‘음과 양이 완벽하게 조화된 최고의 결정체’라 평가하고 싶다. 그에게서는 한 치도 더할 것이 없고 덜어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미스터트롯’ 전에 출연했던 oo방송 ‘아침마당’은 그 후에 보게 되었다. 스토리가 있는 노래 프로그램이었다. 출연자들의 아픔과 슬픔을 노래로 토해내는 트롯경연장이었다.
노래를 삼긴 사람 시름이 많기도 많겠구나
이르고 다 못 일러 노래 불러 풀었던가
眞實로 풀릴 거시면 나도 불러 보리라 / 신흠
저마다 맺힌 한을 풀어내는 경연장에서 영웅은 2번이나 고배를 마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도전하였다. 그 때 그의 가족들도 함께 출연했다. 미용실을 하는 순박한 어머니, 입담 좋은 할머니 그리고 정이 많은 손자가 사는 가정에서 나는 꿈에 도전하는 젊은이를 보았다. 노래 뒤에 담긴 한부모 가정의 감춰진 세월도 읽을 수 있었다. 무대 위에서 영웅의 표정은 오히려 밝았다. 절제된 매너와 맑고 깨끗한 이미지 그리고 따듯한 효성은 그가 가진 무형의 자산이 되었다.
세상에 저절로 피는 꽃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이 경연에서 새로운 기록까지 세우면서 5승에 성공하였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이름, 영웅을 노래로써 성취했다. 트로트의 영웅이 되었다. 우리들의 착한 영웅의 탄생이었다. 그는 경쟁해서 무조건 이기는 영웅이 아니라 경쟁은 했지만 자신의 승리보다 패자를 위해 눈물짓는 영웅이었다. 땀의 시대를 지나 눈물의 시대가 요구하는 영웅이다. 바야흐로 영웅시대가 열렸다. 오늘 나는 '임영웅 5연승 도전기'를 다시보면서 ‘성공한 현재의 영웅보다는 성공해가는 과거의 임영웅’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얼마 전 남도 겨울여행을 다녀왔다. 완도 가는 길에 잠시 해남땅 고갯마루 오소재에서 ‘고향무정’ 노래비를 답사했다. ‘고향무정’은 산업화 시대의 망향가로 널리 불렸던 대중가요다. 노래비 앞에 서자 해남 출신 가수 오기택의 묵직한 남저음이 스피커에서 울려 나왔다.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산골짝엔 물이 마르고 기름진
문전옥답 잡초에 묻혀 있네
새들도 집을 찾는 집을 찾는 저 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바다에는 배만 떠 있고
어부들 노래 소리 멎은지 오래일세
언제 들어도 가슴을 울리는 명곡이다. 우리의 영웅찐팬은 원곡 가수의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영웅이 부르는 ‘고향무정’을 들려준다. 진한 감성, 청아한 목소리에 담긴 영웅의 고향무정은 떠나온 고향, 잊혀진 옛고향을 떠올려주었다. 원곡 가수는 아련한 향수에 젖게 했고, 영웅은 나를 내고향 강마을로 데려다 주었다. 역시 영웅은 내마음 속의 ‘TOP of the World’였다.
남도 여행의 피날레는 강진만 끝에 자리한 마량포구였다. 부슬부슬 겨울비가 내리는 가운데 점심 식사할 식당을 찾았다. 보슬비 사이로 영웅의 사진을 출입문에 붙인 식당이 보였다. 영웅의 브로마이드를 본 순간 찐팬 앞에서 더 이상 식당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파란 모자를 쓴 여사장님도 영웅의 찐팬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파란 모자가 먼저 알려주었다. 예상했던 대로 식당 내부는 영웅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영웅이 ‘마량에 가고 싶다’를 부른 후 마량포구는 영웅팬들의 성지가 되었단다. 이 노래의 원곡가수는 따로 있지만, 영웅이 이곳에 와서 한번 불렀을 뿐인데 그후 영웅의 노래가 되고 말았다. 그가 선배 가수의 노래를 부르면 어찌된 영문인지 그의 노래가 된다.(나만 그런가?) 원곡자의 노래는 그의 되새김을 통해 더욱 화려하게 피어나고 짙은 향기를 내뿜는다. 이쯤 되면 영웅은 강도다. 남의 노래를 자기 노래로 빼아았으니......
상차림이 끝나자 우리도 영웅의 시그니처인 오른손을 ㄱ자로 꺾고 <건행!>을 외치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소주 한 잔에 안주는 푸짐한 회에다가 영웅의 미담이 추가되었다. 우리의 찐팬과 파란 모자는 어느새 절친이 된 듯 핸드폰에 서로의 호칭을 저장한다. 그 날 그 식당에서 먹은 생굴로 인해 나는 노로바이러스에 걸려 설사 중이다. 파란 모자가 원인 제공자였지만 원망하지 않겠다. 영웅의 찐팬이라는 이유만으로.....
2024. 01. 25. 耕山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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