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가(廢家)의 시간
지붕은 무너졌는데
기둥 하나가 아직 하늘을 버티고
서까래들은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떠난 자리에는
풀이 먼저 주소를 옮겨 오고
덩굴은 무너진 벽을 끌어안아
오래된 시간을 천천히 덮었다
흙벽의 금 간 틈 사이로
밥짓는 냄새 저녁 연기
마른 기침소리 들린다
들보마다 버티다 지친
삶의 무게가 걸려 있고
처마 끝에는
돌아오지 못한 이름들이 매달려 있다
빈집은 말이 없다
오래된 기억은
사람이 아니라 집이라는 듯
빈집은
사람이 떠난 뒤에도
기억만은
끝내 이사 가지 못한 자리다


빈집이 들려주는 이야기
- 서까래 사이로 흐르는 기억의 선율
정자를 답사하는 길에 만난 외딴 시골집은, 모두가 떠난 자리를 얼마 남지 않은 시간으로 견디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폐허라 부르며 고개를 돌리지만, 홀로 남겨진 집은 고요 속에서 가장 뜨거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집은 소유의 증명이나 안식의 처소로 여겨지지만, 헐벗은 빈집은 그 이면의 정직한 진실을 보여준다. 비바람에 깎여 나간 흙벽과 파란 하늘을 향해 갈비뼈처럼 드러난 서까래를 보며, 집이란 결국 삶의 시간을 잠시 담아두는 그릇임을 깨닫는다. 도시의 화려한 외벽이 감추고 있는 유한성과 고독을, 이 빈집은 아무런 수식 없이 온몸으로 웅변한다.
빈집은 나에게 말을 건다. 사람이 떠난 공간은 결코 비어 있지 않다. 무너진 서까래 사이로 아득한 기억의 환영들이 피어오른다. 흙벽 너머로 할머니와 아이들의 모습이 아스라이 떠오르고, 천장을 지탱했던 나무 뼈대는 누군가의 고단한 하루를 품어주던 어깨였다. 낡은 잉크병과 골무, 이끼 낀 사진첩은 사라지지 않은 일상의 흔적을 보여준다. 빈집은 상실의 장소를 넘어, 잊혀가는 존재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기억의 성소가 된다.
빈집이 들려주는 메시지는 ‘연결과 회귀’다. 첫 번째 이야기는 연결이다. 전신주 사이를 잇는 전선처럼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나에게 닿아 있다. 마당 구석의 낡은 소품들은 주인의 손때가 묻은 따뜻한 사연을 속삭인다. 바느질하던 어머니의 정성과 농사짓던 아버지의 땀이 켜켜이 쌓여, 집은 여전히 그들의 숨결을 간직한 채 나를 기다린다.
두 번째 이야기는 회귀다. 지붕을 떠난 볏집 대신 새들과 넝쿨이 자리를 차지한다. 인위적인 것들은 결국 자연으로 돌아간다. 죽어가는 듯한 빈집 위에서 생명은 다시 피어나고, 무너진 흙은 다시 땅이 된다. 삶 역시 거창한 성취보다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과정임을 잔잔히 들려준다.
빈집을 바라보는 일은 내 삶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지지만, 남은 흔적은 새로운 생명과 기억으로 다시 피어난다. 허무와 온기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나는 삶의 유한함을 긍정하며 오늘이라는 시간 위에 나만의 무늬를 새겨 넣어야 함을 배운다.나는 이 빈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앙상한 뼈대 사이로 지나는 바람 소리는 상실의 슬픔이 아니라, 이곳에 머물렀던 모든 생명에 대한 찬가다. 빈집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결국 내가 지금 누리는 순간의 소중함과 언젠가 남기게 될 흔적들에 대한 다정한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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