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정의 메아리
괴강의 물결은 은빛으로 흘러
제월대 바위에 노래로 부딪친다
고산의 뜻은
벼슬의 무게를 벗고
산 하나를 높이로 삼았다.
편액에 스민 풍류
명나라 사신의 문향이
바람결에 번진다
벽초의 그림자
잃어버린 언어들
물소리에 잠겨 흐른다
흐르는 것은 물만이 아니라
사람도 흐른다
그러나 남는 것은
세월을 건너온 정신
흐름 위에 서 있는
한 점의 높이
고산정의 메아리다




흐르는 것들 사이에 서서
- 孤山亭 답사 기행
오월의 빛은 늘 조금 늦게 깊어진다. 제월대로 접어드는 길에서도 그랬다. 연둣빛이 막 지나 초록이 자리를 잡아가고, 물빛은 햇살을 받아 더 투명해지는 시기.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절벽 위 솔숲에 숨은 정자, 고산정이 시야에 들어온다. 정자를 머리에 인 제월대는 이름 그대로, 비 갠 뒤의 달빛 같은 맑음이 깃든 자리다. 이곳의 풍경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오래 바라볼수록, 단정하게 마음을 붙잡는다. 물은 낮고 길게 흐르는데, 그 위를 스치는 바람은 가볍다.
이 정자를 세운 이는 孤山 柳根이다. 그의 삶은 한 줄로 정리되지 않는다. 장원 급제한 문장가이자, 임진왜란의 한복판에서 왕을 호종했던 신하였고, 다시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물러나야 했던 정치가였다. 벼슬의 정점과 낙향의 바닥을 모두 지나온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고산정은 은거의 공간에 가깝다.
처음 이름은 솔숲에 자리한 만송정이었다.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그는 이름을 바꾸었다. ‘외로운 산’이라는 뜻의 고산(孤山). 그것은 자연을 가리키는 말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혼자 서되, 무너지지 않는 자리. 이 정자는 바로 그 마음의 모습이다.
정자를 마주하면 먼저 두 개의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孤山亭’. 이 글씨를 쓴 이는 완산 이씨 이원이다. 획은 곧고, 힘이 있다. 군더더기 없이 밀고 나가는 선들 사이에 묘하게 숨이 살아 있다. 꾸미지 않았지만 기품이 있다. 고산의 인물 됨됨이를 새긴 듯한 느낌이다.또하나의 현판은 '湖山勝集'(호산승집)이다. ‘호수와 산의 빼어난 경치가 모여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이 한데 어우러진 장소임을 찬탄하는 문구다. 획 하나하나가 두툼하고 힘이 넘치고, 단번에 내려쓴 듯한 호방함이 느껴지며, 오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중후한 멋을 풍긴다. 왼쪽에 작게 적힌 낙관은 명나라의 문신이자 서예가였던 주지번(朱之蕃)이라고 쓰여 있다. 주지번이 조선에 사신으로 왔을 때 이곳까지 와서 풍류를 즐긴 후, 남긴 편액 글씨다. 이 작은 정자에서 국제적인 문화 교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정자의 주인공 고산 유근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명나라 사신 웅화의 <고산정사기>도 걸려 있다. 소나무와 대숲이 둘러싼 자리, 그는 이곳을 ‘은자의 집’이라 불렀다.
세월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곳은 다른 시간을 맞는다. 근대에 이르러, 1930년대 대하소설 <임꺽정>의 작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벽초 홍명희. 그의 고향이 바로 여기 제월리다. 그의 아버지는 경술국치의 치욕을 견디지 못해 자결하고, 벽초는 이곳에서 괴산의 3.1운동을 준비했다. 고산정과 제월대는 조선 중기의 선비가 물러나 앉았던 자리이면서, 동시에 일제강점기의 격동을 견딘 근대인의 시야와도 맞닿아 있다. 한쪽에는 벼슬을 버린 선비의 고독이, 다른 한쪽에는 나라를 잃은 시대의 분노와 의지가 겹친다. 풍경은 같지만, 그 위에 얹힌 시간의 결은 다르다. 고산은 권력을 지나 이곳에 앉았고, 벽초는 시대의 균열 속에서 다시 이 땅을 밟았다. 서로 다른 시간, 서로 다른 이유. 그러나 둘 다 ‘자기 자리’를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
계곡을 벗어나면 물은 강이 된다. 암서재에서 흘러온 화양천은 괴강과 합류한다. 흐르는 것을 따라가면 굳이 방향을 묻지 않아도 된다. 그 흐름의 끝에서 만난 것이 고산정이다. 고산정은 강 위에 걸려 있다기보다 흐름 위에 놓여 있다. 정자에 앉아 강을 바라보면, 물은 아무 말이 없다. 그러나 이미 충분히 말하고 있었다. 암서재에서 붙들고 있던 ‘뜻’이, 이곳까지 흘러오며 어떻게 변하는지를. 화양천에서는 물이 뜻을 닮았고, 여기서는 뜻이 물을 닮았다. 화양천의 단단하던 생각은 괴강에서 부드러워지고 넓어졌다. 물은 흐르지만, 더 이상 급하지 않다. 흘러가며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산의 그림자, 바람의 결, 하늘의 빛을 거부하지 않는다. 화양천의 위를 향하던 생각이 수평으로 번진다. 오월의 고산정은 아무 말이 없다. 다만 물을 내려다보게 할 뿐이다. 그리고 오래 바라보다 보면, 알게 된다.
흐르는 것은 강물만이 아니라는 것을.

'인문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누정기행 13 고성 청간정(淸澗亭) (12) | 2026.06.06 |
|---|---|
| 누정기행11 괴산 암서재(巖棲齋) (14) | 2026.06.01 |
| 누정기행10 거창 용원정(龍源亭) (10) | 2026.05.28 |
| 누정기행9 거창 요수정(樂水亭) (13) | 2026.05.25 |
| 누정기행 초정(草亭) (19) | 2026.05.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