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기행

누정기행10 거창 용원정(龍源亭)

경산 耕山 2026. 5. 28. 05:02

龍源亭 쌀다리를 건너며


용원정에 닿으면
물은 고요히 말을 삼키고
나무는 그늘로 다가온다

천 석의 쌀을 비워
돌다리 두 개 놓았으니
굶주린 온기 흘러들어
시간은 천년을 건넌다

정자 천장엔
두 마리 용이 얽혀 있고
시선은 하늘로 끌리며
생각은 땅으로 잠긴다

비운 만큼 채워지는 건
쌀독만이 아니었다
물의 근원에서
나눔은 뿌리 내렸다

오늘도 쌀다리 아래
가난한 이들의 고마움이
푸른 이끼 되어 남아 있다

용원정의 백미는 정자 앞 용계천(龍溪川)을 가로지르는 나눔의 실천, 쌀다리다.
조선시대 유학자 구화(九華) 오수(吳守) 선생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선조를 추모하는 마음을 화려한 단청으로 표현한 정자이다.
정자에서 내려다 보이는 주변 풍광, 눈과 귀가 모두 시원하다.

용원정의 운을 뒤따라 짓다.

깊은 못에 기러기 떠난 지 오래되어 속절없이 괴로운데
찾는 이의 마음을 반겨주는 새로 지은 정자 하나 있구나
경치를 감상하니 선조의 자취가 흐르는 물처럼 감돌고
주위는 온통 물과 돌이요, 시렁에는 오직 책들만 가득하네
거문고와 책을 벗 삼으며 타고온 말을 쉬게 하니
한 번 바라봄에 가슴속이 시원하게 풀리는구나. // 안동 사람 권창현이 쓰다.

5월의 무성한 벚나무 그늘 아래, 천 석의 쌀로 일구어낸 돌다리를 건너며 배운다. 진정한 풍류란 사람을 향한 따뜻한 길 하나를 내는 일임을.......


돌 위에 놓인 마음

5월의 햇살이 신록을 넘어 짙은 초록으로 익어갈 때, 용원정(龍源亭)은 요수정의 명성과는 또 다른 거창의 미학을 선사한다. 벚꽃이 지고 난 자리에는 두터운 벚나무 잎들이 겹겹이 쌓여 서늘한 그늘 터널을 이루고, 그 끝에 쌀다리가 고즈넉히 놓여 있다. 
용원정의 백미는 정자 앞 용계천을 가로지르는 쌀다리다. 1758년, 오성재·오성화 형제가 쌀 천 섬을 털어  다리를 놓았다는 이야기. 물을 건너지 못하던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놓았다. 기근에 시달리던 이웃에게는 일거리를 주어 살리고, 길손들에게는 물에 발을 적시지 않는 편안함을 준 다리였다. 허기를 채우고 마음을 잇는 나눔의 다리였다. 다리 모양은 단순하다. 거대한 자연석 두 개를 맞물려 걸쳐 놓은 평교(平橋) 형태로, 길이 약 11m에 이른다. 투박하지만 안정적이며, 장식 없이도 완결된 형태다. 이 다리의 본질은 모양보다 선택에 있다. 먹을 수 있는 쌀을 길로 바꾸었다는 점에서, 쌀다리는 생존을 넘어선 나눔과 공공성을 보여준다.

쌀다리를 건너면 용원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구조는 안정적이고 배치는 절제되어 있다. 자연을 압도하기보다 그 안에 스며드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정자의 형식이다. 그러나 내부는 예상과 다르다. 천장에는 청룡과 황룡이 여의주를 물고 얽혀 있는 단청이 펼쳐져, 외부의 절제와 내부의 화려함이 대비된다. 용원정은 이름 그대로 ‘용이 시작되는 근원(龍源)’을 뜻한다. 기백산 자락에서 흘러내린 물줄기, 즉 발원지에 가까운 이곳은 물의 ‘흐름’이 아니라 ‘시작’이란 의미를 사유하게 만든다. 요수정이 흘러가는 물이 빚어낸 풍경의 완성이라면, 용원정은 물의 ‘시작’을 생각하는 자리다. 정자 안의 편액과 기문, 시판 역시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물의 근원을 밝히며, 모든 흐름은 결국 시작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정자를 나서면 벚나무들이 만든 그늘이 이어진다. 용원정 일대는 거창에서도 손꼽히는 벚꽃 명소로, 봄이면 꽃잎이 쌀다리 위로 흩날리며 또 다른 풍경을 만든다. 꽃이 진 뒤에도 연둣빛을 지나 짙어진 초록의 잎들이 햇빛을 걸러내며 공간 전체에 고요한 깊이를 더한다. 화려함이 사라진 자리에 오히려 오래 머무는 분위기가 생겨난다. 다시 쌀다리를 건너며 생각한다. 요수정이 ‘격조 높은 선비의 정원’이라면, 용원정은 ‘백성을 사랑한 선비의 온기가 남은 숲속 아틀리에’다. 요수정의 물이 ‘마음을 맑게 하는 거울’이라면, 용원정 쌀다리 밑의 물은 ‘이웃의 아픔을 씻어주던 눈물’과 같다.

천 석의 쌀로 일구어낸 돌다리를 건너며 나는 배운다. 진정한 풍류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속에 사람을 향한 따뜻한 길 하나를 내는 일임을. 흐르는 물소리를 듣는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물이 시작된 자리에서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묻는 공간임을. 용원정은 분명한 질문을 남긴다.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그 안에 길을 내는 사람이 될 것인가. 이곳에서 건너는 것은 물이 아니라 생각이다.

벚꽃이 사라진 자리를 메운 짙은 초록과 그늘의 대조를 통해 '쌀다리나눔의 미학'을 더해준다.